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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一同行 서른 일곱번째 - 청주

如一同行  서른 일곱번째 - 청주

가을 장마가 시작하는 날이어 서인지 집을 나서는 시간부터 빗줄기가 예사스럽지 않다.굵은 빗줄기를 감안하여여행지를 멀지 않은 청주로 설정한다. 보물찾기의 청주여행은 세 번째 여행에서 세종의 비상을 따라 청주박물관을 방문한 것과 열일곱번째 여행에 나타난 제천여행에 들른 청주 계산리 오층석탑이 있다. 이번 여행은 빗속의 사찰을 찾아 본다. 청주시내에 자리하며 많은 불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보물인 커다란 불상들을 품고 있는 용화사 이다. △ 용화사 용화사는 법주사의 말사로 옛 이름은 사뇌사로,용화사 법당 상량문(上樑文:건축공사의 시작과 끝, 참여자의 이름을 기록한 글)에 의하면 이곳은 1902년에 만든 절로, 고종의 후궁인 엄비(嚴妃)의 명에 의해 청주지주 이희복이 창건했다. 전설에 의하면 꿈에 청주에서 7구의 석불이 나타나 집을 지어달라고 간청하자, 이희복이어명으로 조사하니,자신의 꿈과 일치하여 사람을 보내어 청주 서북쪽의 늪에서 이들 석불을 발견하였다는 유래가 있다. 이희복은 상당산성안에 있던보국사를 이곳으로 옮겨용화사를 세우고, 미륵보전에7구의 석불을 모시게 된 것이다.1935년 화제와 6.25 동란에 소실되는 일로 칠존 석불도 노천에 방치되다가 1972년 신도들의 시주로 콘크리트 미륵보전을 중건하고 내부에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1989년 4월 보물 제 985호 로 승격지정 되며, 월탄 스님이 목조건물인 용화보전 불사를 1995년 준공하여 이곳에 봉안해 오고 있으며 2008년 극락전을 준공 4분의 불상을 모시고 있다. △ 용화사 이사찰은 전통 사찰이지만 템프스테이도 가능하고 불교대학도 운영하고 있다. 오층 석탑은 1996년에 조성되고무십천의 불상들은 7개중 3개는 심불전에 , 4개는 극락전에 봉안되어 있다. △ 삼불전내 삼불상 △ 극락전내 사불상 5구의 불상과 2구의 보살상으로 되어있는 석불들은 모두 거대한 불상이라는 점이 주목되는데 최고 5.5m, 최저 1.4m이다.7구의 불상들은 모두 양 어깨를 감싼 옷을 입고 있는 입상과 좌상으로 얼굴과 세부기법,특히 옷주름 표현과 손모양 등을 감안할 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용화전에는 약사여래불,미륵불,석가모니불이있다. △ (좌)미륵불, (중)석가모니불, (우)약사여래불 이들 중 미륵불은머리 위에 솟아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유난히 크다. 옷은 양 어깨를감싸고 있으며 신체는 전체적으로 양감이 풍부하며 가슴 부위에卍자가 양각되어 있다. 나발(螺髮)또한 굵고 큼직하여 특징적으로 보인다.얼굴은 장대하고 원만한 편이어서 박력을 느끼게 한다.입을 제외한 이목구비가 비례적으로 커서 잘 조화되고 있다.신체는 장대하고 우람한 편으로 당당하게 서 있는 상이다.그러나 허리나 가슴의 표현에서 양감이나 탄력감이 없어지고 건장함을 보여주고 있다.체구에 비해서 큼직하게 보이는 두 손은 오른손을 들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나타내었고,왼손을 내려 여원인(與願印)을 지었다.두 손 모두 집게손가락만 펴고 있어서 고풍(古風)이 엿보인다.옷은 통견의(通肩衣)로 두 어깨를 걸쳐 다리로 흘러내렸는데,가슴에는U자형으로 트여 있고 여기에는卍자가 표시되었다.이 아래 승각기인 상내의와 하내의인 군의가 보이며 이를 묶은 띠 매듭도 표현되었다.불의는 주로 평행 계단식 옷주름과 띠주름을 혼합했다.신라 불상에 비하여 탄력성이 부족하다.얼굴이나 체구의 형태,옷주름의 선묘,卍자 등 세부 표현에 이르기까지 고려 초기의 시대적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는 거구의 불상이라 하겠다. 석가모니 불상은 독특한 옷주름이 있고,뒷면에는 거대한 나한상(羅漢像)이 조각되었는데 이는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불상 역시 장대한 형태이다.나발의 머리에는 육계가 비례적으로 알맞게 솟아 있다.얼굴은 앞 상보다는 정제되었고 이목구비도 알맞은 편이다.거구의 신체는 상체가 짧고 하체가 긴 편이며 양감은 풍부하지 못하다.그러나 허리나 팔의 굴곡이 뚜렷해서 인체미를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나타내고 있다.불의는 통견의인데 굽타식으로 목 주위에서 목깃이 반전하는 착의법이다.옷주름은V자형으로 하반신까지 표현하였는데,돌기 주름이면서 구불구불한 선묘를 나타내고 있다.이러한 구불구불한 선이 불상 조각에 표현된 것은 충주 탄금대 마애불 등 충청북도 혹은 경기도 일대에 다소의 예가 남아 있다.그래서 시대적·지방적 양식 특징을 잘 보여준다.그러나 이 구불구불한 물결 선묘는 아직도 굴곡이 심한 편은 아니지만,가슴의♧꼴 꽃무늬 등 도식적인 특징도 나타내고 있어서 이 불상의 편년 설정에 참고된다.이 불상의 뒷면[背面]에 거대한 나한상을 부조하였는데,이러한 나한상은 이천 마애나한상 등과 친연성이 있다.나한 신앙 혹은 불상 조성자와 연관성이 있는 상이 아닐까 한다. 약사여래부처님은 머리와 두 손을 후보(後補)한 것으로 판단된다.현상의 얼굴은 풍만하고 중후한 모습인데,체구 또한 건장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상체가 짧은 편인 거구의 이 신체는 양감이 풍부하지 않아 투박하게 표현되었다.통견의 불의는 다소 두꺼워지는 경향을 보인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청주 용화사 석조불상군(淸州龍華寺石造佛像群))] 2008년 극락전을 신축하여 용화보전 앞쪽에 모신 유마거사좌상,미상,보현보살좌상,미륵불입상 등4구를 안치하였다. △ (좌)보현보살좌상, (우)미륵불입상 △ (좌)유마거사좌상, (우)미상 좌상들 역시 후보한 부분이 있다.비만한 얼굴에 두건을 쓴 모습의 상은 하체가 길고 건장하지만 세련미는 없다.왼손을 들어 병을 잡고 있으며,옷자락 무늬도 혼란되어 시대적인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 빗속의 안심사 불상들을 접한 후 안심사로 향한다안심사를 찾는 길에 빗줄기가 줄어들 기세가 보이지 않는다. 사찰의 입구 부터 빗줄기로 인하여 사찰은 적막하다 주차장에는 빗속에서도 방문한 차량이 있었으나 요사체에 들어 담소를 나누는 듯하다. △ 안심사 안심사의 보물인 대웅전 옆에는 국보인 안심사 영산회 괘불탱이 빗속에 걸려 있다. 이 괘불탱은 이사찰에서 보관 중인 괘불탱을 묘사 하여 설치한 것으로 사시사철 우리가 볼수 있게 하여준다. 3년전 이곳 방문시 내게 무척 감동을 준 것이 생각난다. 많은 사찰의 괘불탱을 쉽게 볼수 가 없는데 이곳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실물이 아니더라도 사찰을 방문하여 이를 보며 보상받았다는 기분이었다. 비바람과 햇볕에 그대로 노출 되어도 괘불탱이 당시와 큰차이가 없다는데 또다른 기쁨을 맛본다. 안심사는 법주사의 말사고 775년 진표율사가 창건하고 1325년 원명구사가 중창하였다 한다.1979년 대웅전을 해체 수리하면서 [충청좌도 청주남령구룡산 안심사중수기]에 의하면 1606년 이전부터 있었고 1626년 송암대사가 대웅전을 중창하고 1672년 기와를 교체하고 지금의 영산전을 창건한다. △ 대웅전 △ 대웅전 옆모습 지금 있는 대웅전은 확실하게 지은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1979년 해체·수리 때 발견한 기와의 기록으로 미루어 조선 인조 때의 건물로 보인다. 석가모니 불상을 모셔 놓은 이 건물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팔작집이었으나 여러차례 중수를 통해 측면이 2칸으로 줄어들었고 지붕도 맛배지붕으로 바뀐 것으로 본다. 원래 맞배지붕이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여러 차례 수리를 통해 건물이 축소·변형되면서 지붕 형식도 바뀐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아 만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 안심사 영산회 괘불탱 이 절의 국보 제 297호인 안심사 영산회 괘불탱이다.석가불이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영산회상을 그린 괘불이다.안심사에 있는 이 괘불은 길이 7.26m, 폭 4.72m의 크기로, 본존인 석가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비롯하여 설법을 듣기 위해 모여든 여러 무리들과 석가를 호위하는 사천왕상 등이 대칭적으로 배치되어 있다.석가불은 오른쪽 어깨가 드러나는 우견편단을 걸치고 손가락을 땅으로 향하게 하여 마귀를 물리치는 의미를 지닌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취하고 중앙에 앉아있다. 길어진 팔과 손의 처리 등 세부적인 표현은 세련되지는 못하지만, 각진 얼굴에 이목구비가 큼직해 근엄해 보이며, 전체적인 신체비례는 안정되어 있다. 광배에 있는 화려한 꽃무늬장식은 석가불을 강조하며 돋보이게 한다. 위로 갈수록 석가 주변의 무리들을 점점 작게 묘사해 상승효과를 나타내었다. 채색은 주로 홍색과 녹색을 사용하였는데 두텁게 칠해 밝은 느낌을 주지 못하며 부분적으로 덧칠을 한 흔적도 보인다. 조선 효종 2년(1652)에 만들어진 이 괘불은 청주의 보살사 괘불이 조성된지 3년 후의 작품으로, 구도상 비슷한 점이 있어 17세기 중엽 충청지역의 불화연구에 도움을 주는 귀중한 작품이다. △ 세존사리탑 청주 안심사 세존 사리탑 과 비로전, 법고 도 있다 빗속의 안심사를 통해 괘불탱을 절 마당에 설치한 것이 다시 한번 좋은 느낌으로 자리한다. 괘불탱은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을 말한다. 이런 여유로일반적으로 접하기가 어려워, 보관하고 있는 사찰을 방문하여도 쉽게 접하지 못하는 문화재이다. 그것이 손상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라 생각해 보지만, 우리의 보물을 접하지 못하고 사진으로 보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실상이 아니더라도 실물 크기로 재현해 놓은 것을 보며 이러한 조치를 하신 누군가에게 무한 감사한다.

如一同行 서른 여섯번째 - 봉화

如一同行  서른 여섯번째 - 봉화

경북 봉화로 여행지를 정한다.춘양목과 송이로 유명한 고장이고, 국립 백두대간 수목원, 청량산 , 산타마을 등 봉화 다움의 볼거리가 풍부한 문화관광의 고장이다. 이번 여행은몰야면에 위치한 국보와 보물을 찾아 길을 나선다. 한여름이지만 흐린 날씨에 봉화에 도착한다. 문화유적을 찾아 접하려는 나에게 또 하나의 과제가 여러 누정을 찾아 보는 것이기에 500년역사가 남아있는 한옥마을인 한과로 유명한 닭실 마을에 도착하여 청암정으로 바로 향한다. △ 충재와 청암정 코로나로 인한 정자의 출입이 통제 되어, 앞을 서성이며, 청암정 정자앞의 충재 툇마루에 앉아 정자를 올려보는 것으로 방문의 목적을 다한다. △ 청암정 여름 햇볕아래의 갇혀 있는 정자를 바라 보면서, 둘레는담으로 둘러 샇인 공간에 갇히어 존재하는 정자가 답답하다는 느낌을 갖는다. 모름지기 정자는 접근도 쉽고, 열린 공간에 자연과 접함에 있어 탁 트여 세상의 이치를 보아온 곳이 아닌가 싶은데, 갑자기 막힌 듯하여 코로나가 운치있는 정자를 속박하는 것 같아 부아가 난다. 다음에 저 청암정 마루에 올라 세상사를 내려다 보리라 마음 먹으며, 닭실 마을도 그때 다시 보면 된다는 생각에 단풍드는 가을을 기약하며 닭실마을을 스치듯 눈에 담고 길을 나선다. △ 국보 마애여래좌상 멀지 않은 곳에 처음 접하는 국보와 보물을 찾아 나선다. 국보 제201호 봉화 복지리 마애여래좌상이다. 얼마전부터 우리는 문화재에 호수를 사용하지 않는다. 문화재청만 유지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를 구별하는 명칭이 어떤 것인지 궁금했는데 , 먼저그 문화재가 존재하는 시나 군의 지명 그리고 리의 표기에 문화제의 구분이 가능한 명칭을 붙여 정한다. 그것이 사찰에 존재한다면 그소재지 리 대신에 사찰의 이름을 사용한다. 이번에 찾아보는 국보, 봉화 북지리 마야여래좌상은 지금은 지림사 라 불리는 사찰의 경내에 존재하지만 명칭이 봉화 지림사 마애여래좌상이 아닌 것은 지림사가 국보로 지정된 1980년이후 불사를 크게 했을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 마애여래좌상 지림사 경내의 마애여래좌상은 화려한 단청의 누각같은 터진 시설안에 보전되어 있다. 그동안 보아 온 석조불은,그 자체로 보전 되는 것.그리고 지붕이 딸린 보호각을 만드는 방법,그리고 철제 프레임에 투명 프라스틱 덮게를 얹은 형태등으로 보존하는 것,박물관으로 옮겨 전시 하는 방법 등,나름 원형을 유지 보전하려 애쓰는 흔적이 보인다. △ 석불전 이번의 마애석불은 나름의 보전을 위한 노력은 인정되나, 마애불의 특징을 살리기에는 너무도 협소한 곳에 갇힌 듯한 느낌이다 . 건물로 둘러진 대부분의 마애불이 그러하듯, 자연과 어울리는 그대로의 모습을 알 수 있게 보존하는 방법은 없을까 ?사찰의 넓은 앞마당과는 대조적으로 한귀퉁이 좌그마하게지어져 보존되는 것이 왠지 마음 한구석을 답답하게 한다.이곳 뿐 아닌 많은 곳의 문화재가 자연 친화적으로 그모습을 유지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 지림사전경과 왼족긑의 석불전 경상북도 봉화군 북지리에는 신라시대의 ‘한절’이라는 대사찰이 있었고, 부근에 27개의 사찰이 있어 500여 명의 승려들이 수도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작품은 자연암벽을 파서 불상이 들어앉을 거대한 방모양의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높이 4.3m의 마애불을 매우 도드라지게 새긴 것이다. △ 마애여래 좌상 넓고 큼직한 얼굴은 양감이 풍부하며 전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어서 박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깨는 다소 움츠린 듯하지만 체구는 당당한 편이며,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가슴에서 U자형의 굵직한 주름을 이루면서 양 팔을 거쳐 길게 늘어져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까지 덮고 있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가슴에 들고 왼손은 무릎에 내리고 있는 모습으로 큼직하게 표현되어 불상의 장중한 멋을 더해주고 있다. 불상 뒤편의 광배(光背)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로 구분하였으며, 곳곳에 작은 부처를 표현하였고, 머리광배의 중심에는 정교한 연꽃무늬를 새기고 있다.불상을 만든 시기는 얼굴이나 신체에 표현된 부드러운 모습 등을 고려할 때 7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며, 영주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 및 여래좌상(보물)과 함께 이 시기 영주·봉화 일대 불상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신라 불교조각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대웅전의 뒷편에는 또다른 마애불 상이 조각되어 있다. △ 대웅전 뒤의 또다른 마애불상 군 앞으로 지림사의 일원으로 잘 보전되리라 생각하며 사찰을 벗어난다. △ 축서사 뭔가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축서사로 향한다. 이곳의 보물은 명칭이 봉화 축서사 비로자나불 좌상 및 목조광배 이다. 지림사에서 출발 문수산 계곡을 따라 오르면 오복하게 자리한 정상 가까운 곳인 축서사에 당도하게 된다. 축서사라는 이름도 생소한 사찰을 찾아 오르고, 맞이하게 된 축서사는 놀라운 모습이었다. 사찰앞까지 차로 오르면 새로이 잘 지어진 큰 사찰을 맞이하게 된다.축서사는 조계종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의 말사이며 673년(문무왕 13년) 의상이 창건하였다 한다. 조선 말기에 일본군이 의병 토벌을 목적으로 불태워 대웅전 1동만 남겼다. 일제강점기에는 한동안 폐사로 있다가 1996년부터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시작하여 1999년에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보광전·적묵당·보물각·응향각·보탑성전·심검당·선열당·안양원·범종각·법성료 등이 있다. △ 축서사 이곳에 새로 조성된 탑과 오래전 지어진 보광전과 조화릅게 절을 중흥 하였으며, 뒤편에는 새로이 조성한 석조삼존불도 경이롭게 자리한다.이곳에서 내려다보이는 전경을 보며 예전에 큰 도량임을 알 수있게 해준다. △ 보광전과 석등 지금은 조선 중기로 추정되는 보광전에 모셔진 석불상은 원래부터 이곳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보광전 앞의 석등은 지금도 그 자태를 잘 유지 하고 있다. 보물 제 995호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목조광배는 보광전에 모셔져 있는데 정문을 바로 하고 모셔지지 않고 오른 쪽 옆문에서 정면으로 보셔져 있다. 내력을 알수는 없으나 보광전의 왼쪽이 벽으로 막혀 있어 이를 등지고 모셔져 있다. 적묵당 뒷편으로 낮은 언덕에 이 불상이 방치되어 있었다 한다. 노천에 존재하여 마멸이 진행되어 세부표현이 뚜렷하지 않다. 머리는 근래에 새로 만들어 올려놓은 것으로 불신만 오랜세월 견디어 온 것이다. 출처 : 법보신문(http://www.beopbo.com) △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목조광배 불상의 높이는 1.08m이며, 얼굴은 가는 눈, 꼭 다문 입, 반듯하고 넓은 신체에서 고요함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에는 주름이 평행 계단식으로 표현되어 다소 형식화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무릎 사이의 부채꼴 모양으로 넓게 퍼진 주름은 다른 불상들의 U자형과는 달리 물결무늬로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는 평행 계단식 옷주름과 함께 9세기 후반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대좌(臺座)는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한 8각으로 상·중·하대를 모두 갖추고 있다. 하대에는 각 면에 사자 1구씩을 새겼고, 중대에는 손을 모으고 있는 인물상을, 상대에는 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현재 불상 뒤에 나무로 만들어진 광배(光背)가 있는데 여기에는 화려한 꽃무늬와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고, 원래의 돌로 만든 광배는 윗부분만 남아있다. △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이 불상은 통일신라 후기에 많이 만들어졌던 비로자나불상 가운데 하나로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과 동일한 특징을 보여주어 당시 조각수법과 신앙형태를 알 수 있다. 석탑기에 의해 9세기 후반에 만들었다는 절대연대가 밝혀져 통일신라 후기의 불상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새롭게 번창하는 사찰들을 보면 무언가 모를 뿌듯함과 풍요를 느끼게 된다. 사찰은 시대에 맞게 변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 한다. 그 또한 새로운 문화의 창조이기도 하다. 오램과 새로움의 조화를 꾀하며 공존하는 것이 또 다른 멋스러움이라 생각 한다. 축서사에서 느낌은 온전한 옛건물에 안취된 불상을 대하며, 그것이 당시의 모습이 아닐지라도 왠지 본인의자리에 앉아 계신다는 느낌이었으나. 지림사의 국보 마애불은 마치 너른 집안의 곳간에 갇혀있는 느낌을 받는다.우리의 문화재가 갇혀 있는 것이 아닌 본래의 자리와 모습을 잘 간직하게 본연의 느낌을 갖을 수 있게 보전관리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까 하는 혼자 만의 기우로 여행을 마무리한다.

如一同行 서른다섯번째 - 태백

如一同行  서른다섯번째 - 태백

얼마전 '산등성이 맞댄 두 개의 옹달샘이란,금강과 섬진강의 시작'이라는 기사를 접하고,섬진강 발원지인 진안의 데미샘과 금강의 발원지인 장수의 뜬봉샘을 찾아 본 것을 떠올리다 보니, 아직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를 보지 못한 것을 깨닫게 된다. 낙동강의 발원지인 황지는 접근이 어렵지 않아 접할 기회가 있었으나, 검룡소는 접근이 그리 쉬운 편이 아닌 것 같은 생각으로 뒤로 미루다 보니 마음속에만 담고 있다가 이번에 방문해보려 길을 나선다. △ 가곡리 고속도로로 영덕으로 령을 넘어 강경항으로부터 해안도로를 통하여 북쪽으로 오른다. 원덕에서 416 도로를 따라 동활계곡과, 너와집 마을을 지나는 길을 따라, 검룡소로 향한다. 해안길의 드라이브는 혼자 만의 감흥으로 간직하려 한다. △ 검룔소 표지석 검룡소의 주차장에서 길을 오르면 검룡소를 알리는 표지석이 보인다. 이곳이 검룡소를 오르는 시작점이다.초행길이라 들른 태백산 국립공원 분소서 검룡소까지는검룡소까지약20분 정도 걸린다고 올라가기를 추천한다. △ 계곡과 등산로 초입은 돌을 깔아 만든 길이 그리고 걷다 보면큰 폭의 산책길이다. 계곡을 따라 오르는 동안 비온 뒤의 날씨이며 걷기를 계속하자니 옷엔 땀이 찬다. 강의 발원지의 선정은 하구로부터 강물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면서 더 긴 물줄기는 본류가 되고 짧은 물줄기는 지류가 된다. 따라서 하구의 기준점으로부터 본류를 따라 가장 먼 곳에 있는 물길의 끝이 발원지가 된다는 것이다.예전 한강의 발원지는 평창 오대산 우통수었는데, 검룡소까지가 약 32키로 더 길다는 것이 발혀져,1987년 국립 지리원이 공식 지정한 한강의 발원지가 된 곳이다. △ 전망대에서 본 검룡소 검룡소는 보존지역이라 가파르게 세운 전망대에서 멀리 내려만 보고 출입이 금지 되어있다. 검룡소는 석회암지대를 뚫고 나오는 냉천(冷泉)이 석회암을 용식하여 독특한 독특한 형상을 가진다. 냉천은 9도씨 정도이고'폭 5미터에 둘레 20미터의 둥그스르름한 샘물이다.지류의 끝으로 이어진 이곳 검룡소에서 솟아 오르는 수량( 하루 2000 ~3000톤)이 514 km를흐르며,12개 하천과 만나서 서해로 들어 간다.수량과 규모를 보면서이전의 데미샘이나 뜬봉샘에서 본 수량이나 그곳의 환경보다는 산이 깊어선지너무도 원시적, 자연적이고신비감마저 느껴져 한강의 지류 답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 용트림 흔적 △ 용트림 △ 용트림 폭포 오랜세월 흐르는 물줄기로 인해 깊이 1~1.5 m, 폭 1~2 m 암반이 파여 흐르는 모습이 용이 꿈틀거리는 듯한 모습이며, 계단식으로 떨어지는 한강 최초의 폭포이고 이름도 용트림 폭포이다. 서해 살던 이무기가 마지막으로 용이 되기 위해 검룡소로 오르기 위한 몸주림으로 생긴 흔적이라 한다. △ 물이 마른 계곡 검룡소로 오르면서 본 모습 중 갑자기 계곡에 물이 없는 곳이 있어 의아했던 것이, 내려 오는 길에 발견한 안내판에 소상히 설명 되었다. '검룡소 지역은 석회암으로 되어 있고 석회암은 빗물에 잘 녹아서 지하에는 동굴이 잘 만들어진다. 이 곳에서 흘러 나와 내려 가는 시냇물은 지하의 통로로 사라지기도 하고, 다시 표면으로 흘러나와 흐르기도 한다. 이곳에서는 많은 양의 물이 흘러내리지만 내려 갈수록 물이 줄어드는 것은 일부의 물이 지하로 흘러서 가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검룡소는 태백산의 물을 모은 지하 연못이 있어 그곳에서 나오는 것인가 ? 계곡 곳곳에 또한 다른 동굴 연못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며 하산한다. 산길로 1.5km 되는 길을 해설사와 동반하면 1시간 반이 걸린다 하니,많은 사람과의 움직임을 감안해도 시간이 너무 걸린다는 생각이었는데, 이곳은 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나 보다라고 생각해본다.여행시 늘 느끼지만 현지의 안내인과 해설사를 통하여,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던 많은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여행의 참맛이 아닌지 생각한다. 이번 여행도 어김없이 아쉬움을 갖는다. 다른 분들은 이런 기회를 꼭 가지시길 바란다. △ 황지 표지석 순간적으로 내리는 지나 가는 비가 차에 오르니 한차례 퍼붓는다. 태백시로 향한다. 정확히 말아면 낙동강의 발원지인황지 연못으로 향한다. △ 황지의 구조 황지 연못의 전설을 알아본다. 원래는 황부자의 집터이다. 주인이 노랭이며 풍족하게 산다. 어느날 노승이 시주를 요구하고 거절해도 거듭 시주를 요구하자, 치우던 쇠똥을 바랑에 넣어준다. 노승은 이에 감사 하고 돌아가던 중, 아기를 업은 며느리가 방아를 찧던 쌀을 시주하며 황부자의 용서를 구하나. 노승은 이집이 운을 다하였으니 뒤를 돌아보지 말고 자신을 따르라 이른다. 구사리 산마루에 이르러 뇌성벽력과 땅이 갈라지는 소리에 뒤돌아 보는 순간 며느리는 돌미륵이되고 황부자의 집은 땅밑으로 꺼져 내려가 간곳 없고 집터는 큰 연못으로 변한다. 이때 집터는 지금의 상지이고, 방아간이 중지, 변소터가 하지로 변했다고 하며 뇌성벽력과 함게 변해버린 연못(집터)에서 유래된 지명이 황지(黃池)인것이다. △ 상지 △ 중지 △ 하지 이곳은 낙동강 1300리의 발원지로 ,지금은 황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곳은 예전엔가뭄일 때 물 을 길어다 먹기도 하고,시민의 상수원으로 사용되었는데, .지금은 광동댐으로 인해 그 역활을 하고 있지 않다. 황지가 도시 한복판에 있었던 연유를 알아보니, 이곳이석탄 산업으로 마을이 흥하게 되고, 이로 인해 외지인의 증가로 도시가 형성될 때, 물이 질퍽한 습지같은 이곳을 피해 외곽으로 터 집을 지어 들어오다 보니 동네 한가운데 못이 남은 것이라 생각한다. 집으로 향하기 전 얼마전 2020년 6월 25일 국보로 승격된 정암사의 수마노탑을 찾아 나선다. 정엄사는 이전 보다 많이 정비되고 멋진 모습이다. 지금도 적멸보궁을 공사 하는 모습이 보인다. △ 정암사 정암사는 「삼국유사」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신라 자장율사(慈藏律師)가 당나라 오대산에서 문수보살로부터 석가모니의 몸에서 나온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받아 귀국한 후, 643년(선덕여왕 12년)에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사찰이다. 정암사에는 수마노탑을 바라보는 자리에 적멸보궁이 자리 잡고 있으며, 이는 통도사, 오대산 중대, 법흥사, 봉정암의 적멸보궁과 더불어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으로서의 위상을 가지고 있다. △ 수마노탑 수마노탑이라는 명칭은 불교에서 금·은과 함께 7보석 중의 하나인 마노(瑪瑙)와 관련이 있으며, 자장율사가 진신사리를 가지고 귀국할 때 서해 용왕이 자장의 도력에 감화하여 준 마노석으로 탑을 쌓았고, 물길을 따라 가져왔다 해서 물 ‘水’ 자를 앞에 붙여 ‘수마노탑(水瑪瑙塔)’이라 불렀다는 설화가 전한다. 수마노탑은 총 길이가 9m에 달하며, 화강암 기단 위에 세워진 1층 탑신에 감실(龕室)을 상징하는 문비가 있고, 그 위로 정교하게 다듬은 모전(模塼)석재를 포개어 쌓았고 옥개석 위 낙수면과 아래 층급받침의 단 수를 층별로 일정하게 더해 쌓았다.이처럼 수마노탑은 국보 제30호인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등 신라시대 이래 모전석탑에서 시작된 조형적인 안정감과 입체감 그리고 균형미를 잘 보여주고 있어 늦어도 고려 시대 이전에 축조된 것을 알 수 있다. △ 수마노탑 1972년 수마노탑 해체 당시에 함께 나온 탑지석(탑의 건립 이유, 수리 기록 등을 적은 돌로 탑 안에 넣어 둠)은 조성역사, 조탑기술 등을 연구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으며,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 국보)·다보탑(국보)을 포함해 탑의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희소한 탑이다. 우리나라는 2000여기에 가까운 석탑이 건립되었으나 탑의 중수과정을 알 수 있는 사례는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국보)과 포항 법광사지 삼층석탑 등 그 예가 매우 희귀하다.수마노탑은 1972년 보수과정에서 출토된 5매의 탑지석과 적멸보궁 옆에 중수비 1기가 전하고 있어 모전석탑의 특성상 여러 차례 중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보수시기와 범위, 공사기간, 참여인원 및 참여사찰 등에 대한 세부적인 기록이 남겨져 있는데, 이러한 자료가 전하는 사례는 수마노탑이 유일하다. △ 수마노탑에서 본 정암사 정암사와 수마노탑은 현존 적멸보궁 가운데 설악산 봉정암과 함께 석탑을 이용해 보궁을 형성한 사례로 주목된다.특히, 석재를 벽돌 형태로 가공해 축조한 모전석탑 형식과 정암사 가람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장소에 건립한 것은 고려시대 유행한 비보사탑 개념 속에서 건립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줌으로써, 시대 변화에 따라 다양한 목적으로 수마노탑이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어한국 석탑 발전사에 있어 주목되는 석탑이다. △ 등밝힌 저녁무렵 수마노탑은 기단에서 상륜부까지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는 모전석탑으로, 석회암 지대라는 지역 특성을 반영하여 고회암(苦灰巖)으로 제작되었고, 쇠퇴한 산천의 기운을 북돋운다는 ‘산천비보(山川裨補) 사상’과 사리신앙을 배경으로 높은 암벽 위에 조성된 특수한 석탑이다.특히, 탑지석을 비롯한 자료에서 수리기록과 연혁을 알 수 있고, 모전석탑으로 조성된 진신사리 봉안탑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다는 점에서 국가지정문화재(국보)로 역사·예술·학술 가치가 충분하다. 오늘은 정말 긴 나들이 길이고, 바다와 산, 계곡을 두루 섭렵 한 하루였다. 우리나라는넓지는 않지만 곳곳에 많은 불거리를 가진 나라라고 생각해 본다.삼면이 바다로 이루어지고, 섬을 가지고 있고, 육지의70 %는 산이어서 그것이 만들어 내는 계곡, 산등성 등 자연환경과그 곳에 자리하며 녹아든 사람의 흔적, 이 모든 것을 다 경험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여행은 흥미롭다. 이즈음은 오래 전에 가본 곳이 가꾸어 지고 다듬어져서 기억속의 모습을 온전히 갖고 있지는 않으나, 예전을 회상해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제껏 여행은 새로운 것을 보는 것, 그리고 오며 가며 다른 방향에서 보는 것, 사시사철의 모습을 보는 것으로 여겨오다가 요즘은 변화된 모습을 보는 것이 하나 추가 되는 느낌이다. 어찌 되었든 볼거리는 현재의 상태를 보는 것 이기 때문이다. 차에서 점심, 저녁을 해결 하시며 늦은 시간까지 동행해주신 모친에 감사하며 해가 떨어진 길을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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