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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一同行 서른 일곱번째 - 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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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如一同行 서른 일곱번째 - 청주

가을 장마가 시작하는 날이어 서인지 집을 나서는 시간부터 빗줄기가 예사스럽지 않다. 굵은 빗줄기를 감안하여 여행지를 멀지 않은 청주로 설정한다. 보물찾기의 청주여행은 세 번째 여행에서 세종의 비상을 따라 청주박물관을 방문한 것과 열일곱번째 여행에 나타난 제천여행에 들른 청주 계산리 오층석탑이 있다. 이번 여행은 빗속의 사찰을 찾아 본다.  청주시내에 자리하며 많은 불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보물인 커다란 불상들을 품고 있는 용화사 이다.

   


 

 △ 용화사

 

용화사는 법주사의 말사로 옛 이름은 사뇌사로, 용화사 법당 상량문(上樑文:건축공사의 시작과 끝, 참여자의 이름을 기록한 글)에 의하면 이곳은 1902년에 만든 절로, 고종의 후궁인 엄비(嚴妃)의 명에 의해 청주지주 이희복이 창건했다. 전설에 의하면 꿈에 청주에서 7구의 석불이 나타나 집을 지어달라고 간청하자,  이희복이 어명으로 조사하니, 자신의 꿈과 일치하여 사람을 보내어 청주 서북쪽의 늪에서 이들 석불을 발견하였다는 유래가 있다.  이희복은 상당산성안에 있던 보국사를 이곳으로 옮겨 용화사를 세우고, 미륵보전에 7구의 석불을 모시게 된 것이다. 1935년 화제와 6.25 동란에 소실되는 일로 칠존 석불도 노천에 방치되다가 1972년 신도들의 시주로 콘크리트 미륵보전을 중건하고 내부에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1989년 4월 보물 제 985호 로 승격지정 되며, 월탄 스님이 목조건물인 용화보전 불사를 1995년 준공하여 이곳에 봉안해 오고 있으며 2008년 극락전을 준공 4분의 불상을 모시고 있다.

 

 

 △ 용화사

 

이사찰은 전통 사찰이지만 템프스테이도 가능하고 불교대학도 운영하고 있다.

오층 석탑은 1996년에 조성되고 무십천의 불상들은 7개중 3개는 심불전에 , 4개는 극락전에 봉안되어 있다. 

 

 

 

 △ 삼불전내 삼불상

 

 

 △ 극락전내 사불상

 

5구의 불상과 2구의 보살상으로 되어있는 석불들은 모두 거대한 불상이라는 점이 주목되는데 최고 5.5m, 최저 1.4m이다. 7구의 불상들은 모두 양 어깨를 감싼 옷을 입고 있는 입상과 좌상으로 얼굴과 세부기법, 특히 옷주름 표현과 손모양 등을 감안할 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용화전에는 약사여래불, 미륵불, 석가모니불이있다.



 

 △ (좌)미륵불, (중)석가모니불, (우)약사여래불


이들 중 미륵불은 머리 위에 솟아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유난히 크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신체는 전체적으로 양감이 풍부하며 가슴 부위에 卍 자가 양각되어 있다. 

나발(螺髮) 또한 굵고 큼직하여 특징적으로 보인다. 얼굴은 장대하고 원만한 편이어서 박력을 느끼게 한다. 입을 제외한 이목구비가 비례적으로 커서 잘 조화되고 있다.신체는 장대하고 우람한 편으로 당당하게 서 있는 상이다. 그러나 허리나 가슴의 표현에서 양감이나 탄력감이 없어지고 건장함을 보여주고 있다. 체구에 비해서 큼직하게 보이는 두 손은 오른손을 들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나타내었고, 왼손을 내려 여원인(與願印)을 지었다.두 손 모두 집게손가락만 펴고 있어서 고풍(古風)이 엿보인다. 옷은 통견의(通肩衣)로 두 어깨를 걸쳐 다리로 흘러내렸는데, 가슴에는 U자형으로 트여 있고 여기에는 卍자가 표시되었다. 이 아래 승각기인 상내의와 하내의인 군의가 보이며 이를 묶은 띠 매듭도 표현되었다.불의는 주로 평행 계단식 옷주름과 띠주름을 혼합했다. 신라 불상에 비하여 탄력성이 부족하다. 얼굴이나 체구의 형태, 옷주름의 선묘, 卍자 등 세부 표현에 이르기까지 고려 초기의 시대적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는 거구의 불상이라 하겠다.


석가모니 불상은 독특한 옷주름이 있고, 뒷면에는 거대한 나한상(羅漢像)이 조각되었는데 이는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불상 역시 장대한 형태이다. 나발의 머리에는 육계가 비례적으로 알맞게 솟아 있다. 얼굴은 앞 상보다는 정제되었고 이목구비도 알맞은 편이다. 거구의 신체는 상체가 짧고 하체가 긴 편이며 양감은 풍부하지 못하다. 그러나 허리나 팔의 굴곡이 뚜렷해서 인체미를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나타내고 있다. 불의는 통견의인데 굽타식으로 목 주위에서 목깃이 반전하는 착의법이다.옷주름은 V자형으로 하반신까지 표현하였는데, 돌기 주름이면서 구불구불한 선묘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구불구불한 선이 불상 조각에 표현된 것은 충주 탄금대 마애불 등 충청북도 혹은 경기도 일대에 다소의 예가 남아 있다. 그래서 시대적·지방적 양식 특징을 잘 보여준다.그러나 이 구불구불한 물결 선묘는 아직도 굴곡이 심한 편은 아니지만, 가슴의 ♧꼴 꽃무늬 등 도식적인 특징도 나타내고 있어서 이 불상의 편년 설정에 참고된다. 이 불상의 뒷면[背面]에 거대한 나한상을 부조하였는데, 이러한 나한상은 이천 마애나한상 등과 친연성이 있다. 나한 신앙 혹은 불상 조성자와 연관성이 있는 상이 아닐까 한다.


약사여래부처님은 머리와 두 손을 후보(後補)한 것으로 판단된다. 현상의 얼굴은 풍만하고 중후한 모습인데, 체구 또한 건장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상체가 짧은 편인 거구의 이 신체는 양감이 풍부하지 않아 투박하게 표현되었다. 통견의 불의는 다소 두꺼워지는 경향을 보인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청주 용화사 석조불상군(淸州龍華寺石造佛像群))]


2008년 극락전을 신축하여 용화보전 앞쪽에 모신 유마거사좌상, 미상, 보현보살좌상, 미륵불입상 등 4구를 안치하였다.

 

 

 △ (좌)보현보살좌상, (우)미륵불입상


 

 △ (좌)유마거사좌상, (우)미상

 

좌상들 역시 후보한 부분이 있다. 비만한 얼굴에 두건을 쓴 모습의 상은 하체가 길고 건장하지만 세련미는 없다. 왼손을 들어 병을 잡고 있으며, 옷자락 무늬도 혼란되어 시대적인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 빗속의 안심사

 


불상들을 접한 후 안심사로 향한다 안심사를 찾는 길에 빗줄기가 줄어들 기세가 보이지 않는다. 사찰의 입구 부터 빗줄기로 인하여 사찰은 적막하다 주차장에는 빗속에서도 방문한 차량이 있었으나 요사체에 들어 담소를 나누는 듯하다.

 

 

 △ 안심사

 


안심사의 보물인 대웅전 옆에는 국보인 안심사 영산회 괘불탱이 빗속에 걸려 있다. 이 괘불탱은 이사찰에서 보관 중인 괘불탱을 묘사 하여 설치한 것으로 사시사철 우리가 볼수 있게 하여준다. 3년전 이곳 방문시 내게 무척 감동을 준 것이 생각난다. 많은 사찰의 괘불탱을 쉽게 볼수 가 없는데 이곳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실물이 아니더라도 사찰을 방문하여 이를 보며 보상받았다는 기분이었다. 

비바람과 햇볕에 그대로 노출 되어도 괘불탱이 당시와 큰차이가 없다는데 또다른 기쁨을 맛본다.

 

안심사는 법주사의 말사고 775년 진표율사가 창건하고 1325년 원명구사가 중창하였다 한다. 1979년 대웅전을 해체 수리하면서 [충청좌도 청주남령구룡산 안심사중수기]에 의하면 1606년 이전부터 있었고 1626년 송암대사가 대웅전을 중창하고 1672년 기와를 교체하고 지금의 영산전을 창건한다.

 

 

 △ 대웅전

 

 

 △ 대웅전 옆모습

 

지금 있는 대웅전은 확실하게 지은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1979년 해체·수리 때 발견한 기와의 기록으로 미루어 조선 인조 때의 건물로 보인다.

 

석가모니 불상을 모셔 놓은 이 건물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팔작집이었으나 여러차례 중수를 통해 측면이 2칸으로 줄어들었고 지붕도 맛배지붕으로 바뀐 것으로 본다. 원래 맞배지붕이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여러 차례 수리를 통해 건물이 축소·변형되면서 지붕 형식도 바뀐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아 만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 안심사 영산회 괘불탱

 

이 절의 국보 제 297호인 안심사 영산회 괘불탱이다.  석가불이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영산회상을 그린 괘불이다. 안심사에 있는 이 괘불은 길이 7.26m, 폭 4.72m의 크기로, 본존인 석가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비롯하여 설법을 듣기 위해 모여든 여러 무리들과 석가를 호위하는 사천왕상 등이 대칭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석가불은 오른쪽 어깨가 드러나는 우견편단을 걸치고 손가락을 땅으로 향하게 하여 마귀를 물리치는 의미를 지닌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취하고 중앙에 앉아있다. 길어진 팔과 손의 처리 등 세부적인 표현은 세련되지는 못하지만, 각진 얼굴에 이목구비가 큼직해 근엄해 보이며, 전체적인 신체비례는 안정되어 있다. 

광배에 있는 화려한 꽃무늬장식은 석가불을 강조하며 돋보이게 한다. 위로 갈수록 석가 주변의 무리들을 점점 작게 묘사해 상승효과를 나타내었다. 채색은 주로 홍색과 녹색을 사용하였는데 두텁게 칠해 밝은 느낌을 주지 못하며 부분적으로 덧칠을 한 흔적도 보인다.

조선 효종 2년(1652)에 만들어진 이 괘불은 청주의 보살사 괘불이 조성된지 3년 후의 작품으로, 구도상 비슷한 점이 있어 17세기 중엽 충청지역의 불화연구에 도움을 주는 귀중한 작품이다.

 

  

 

 △ 세존사리탑

 

청주 안심사 세존 사리탑 과 비로전, 법고 도 있다

빗속의 안심사를 통해 괘불탱을 절 마당에 설치한 것이 다시 한번 좋은 느낌으로 자리한다. 괘불탱은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을 말한다. 이런 여유로 일반적으로 접하기가 어려워, 보관하고 있는 사찰을 방문하여도 쉽게 접하지 못하는 문화재이다.


그것이 손상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라 생각해 보지만, 우리의 보물을 접하지 못하고 사진으로 보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실상이 아니더라도 실물 크기로 재현해 놓은 것을 보며 이러한 조치를 하신 누군가에게 무한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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