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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一同行 쉰네번째 - 청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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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如一同行 쉰네번째 - 청주(2)

- 청주박물관, 용두사지철당간, 비중리 석조여래삼존상

서책의 소개를 하다 보니 미진한 흥덕사와 직지에 관하여 몇가지 알아본다. [직지]는 [백운 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로 이는 1372년 (공민왕 21년) 백운화상 경한이 석옥정공 화상으로부터 받은 [불조직지심체요절]을 증보하여 상하권으로 엮은 것을, 백운 화상이 입적하고 3년 뒤인 1377년에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찍어낸 초인본이다. 지금은 하권만이 프랑스 국립박물관에 있다. 고간본(古刊本)으로는 1387년 여주 취암사에서 간행한 목판본으로 보물 제 1132호로 지정되어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과 국립중앙박물관에 상하권 1책이 각각소장 되어 있다고한다. 흥덕사지와 직지가 청주는 시내에도 많은 문화 유산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번엔 지난 여행에 청주박물관의 많은 보물 중 일부를 소개 못한 것이 있어, 이번 청주 여행을 통하여 보물들을 소개해 보려 한다. 이전에 네번째 여행지 세종을 방문시 불비상을 찾아 청주 박물관으로 발걸음을 하였을 때, 이곳의 자랑인 청주 지역에서만 발견된 불비상에 관하여만 소개 되어, 이 기회에 미처 소개 하지 못한 다른 문화재도 소개해 보려 한다. 이곳에는 고인쇄박물관내  직지 발간지인 흥덕사  소재인 청주시 운천동에서 금동불상과 고려시대의 청동 금고(金鼓)와 함께 출토된 동종인 청주 운천동 츨토 동종이 소장되어 있다.

청주박물관에서 본 종의 발굴지인 흥덕사를 이번에 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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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운천동 출토동종] 좌측 두개는 박물관, 우측 흥덕사지 복원품 총 길이가 78㎝, 종 몸체 높이 64㎝, 입지름 47.4㎝인 중간 크기의 종으로 위·아래 단에 어떠한 문양도 없이 단순하게 구획만 둔 것이, 오히려 이 종의 특징이다.

사각형의 연곽 너비 부분에는 3구의 비천상과 당초문, 3보 문양으로 꾸몄고, 그 안에 9개의 돌출된 연뢰(蓮蕾)가 있다. 종 몸의 앞뒤에는 2구의 비천상이 조각되어 있다. 연꽃으로 장식한 종을 치는 부분인 원형의 당좌를 2개 배치하였는데 당좌에는 덩굴무늬가 새겨 있다. 현재 용통은 일부 없어졌으나, 종의 고리부분인 용뉴는 한 마리 용이 입을 벌리고 목을 구부려 천판을 물고 있는 형태가 완전히 남아 있다. 또한 앞뒤 두구의 비천상과 당좌의 문양으로 미루어 통일신라시대 후기(9세기 중엽 경)의 종으로 추정된다. 이를 수선 복원하여 원본은 청주박물관에 그리고 복원품은 흥덕사에 전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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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 1380호 신경행 청난공신 교서 및 관련서류]

 

신경행(1559∼1623)과 관련된 문적으로 신경행 청난공신교서(辛景行 淸難功臣敎書)를 비롯하여 유서(諭書), 시호서경(諡號署經, 2점), 증시교지(贈諡敎旨), 조은신공시장(釣隱辛公諡狀), 청난원종공신록권(淸難原從功臣錄券), 이십공신회맹록(二十功臣會盟錄), 이십일공신회맹록(二十一功臣會盟錄) 등 모두 8종 9점이다.

신경행은 조선 선조 10년(1577) 문과에 급제하여 한산군수가 되었으며, 충청도병마절도사 등의 벼슬을 하였다. 선조 29년(1596) 7월에 이몽학이 충청도 홍산에서 난을 일으켰을 때 이를 평정하는데 세운 공으로 청난공신이 되어 영성군에 봉해졌다. 죽은 뒤에 예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시호는 ‘충익’이다. 신경행 청난공신교서는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신경행에게 내린 것으로,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선무공신 및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한 호성공신과 함께 선조 37년(1604)에 발급되었다. 이 교서는 녹훈 사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청난공신 포상 규정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교서의 양식과 문체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유서는 선조 41년(1608) 6월 16일에 신경행을 충청도병마절도사로 임명하면서 제1부의 밀부를 내린 유서이다. 유서 가운데 제1부를 내린 것은 매우 희귀한 것으로 가치가 있다. 시호서경(2점)·증시교지·조은신공시장 등은 신경행이 ‘충익’이란 시호를 받는 과정을 알 수 있는 문서들이다. 시호서경은 사헌부 시호서경과 사간원 시호서경이 있는데, 순조 11년(1811) 6월에 증예조판서 신경행의 시호를 충익으로 정하는 것에 대하여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동의한 문서이다. 증시교지는 순조 12년(1812) 1월에 신경행에게 충익의 시호를 내리는 교지이다. 조은신공시장은 신경행이 시호를 받기 위하여 그가 살았을 때의 한 일을 가선대부 김이영(金履永, 1755∼1845)이 지은 글이다. 청난원종공신록권은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선조 38년(1605) 4월 16일에 공신도감에서 신경행의 아들인 주부(主簿) 신면(辛勉)에게 내려준 녹권이다. 이 녹권은 공신에 대한 대우와 포상규정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조 원종공신관계 연구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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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 1880 호 청주 명암동 출토 ‘단산오악’명 고려 먹]

 

이곳의 특이한 소장 품 중의 하나는 “청주 명암동 출토 ‘단산오옥’명 고려 먹”은 1998년 청주시 동부우회도로 건설공사 구간 내에 속한 명암동 1지구에서 발굴된 고려시대 목관묘에서 출토된 현존(現存)하는 가장 오래된 고려 먹이다. 출토 당시 이 먹은 피장자 머리맡 부근 철제가위의 위에 두 토막이 난 상태로 “단산오(丹山烏)”라는 글자가 종서(縱書)되어 있는 면이 위쪽으로 놓여 있었다고 한다. ‘烏’자 밑에 ‘一’자 획이 보이는데, 이는 ‘玉’의 첫 획으로 먹을 갈아 사용하면서 닳고 남게 된 획으로 추정된다. ‘단산(丹山)’은 1018년(고려 현종 9)부터 1318년(고려 충숙왕 5)에 단양군(丹陽郡)으로 승격될 때까지 사용된 단양의 옛 명칭이며, ‘오옥(烏玉)’은 먹의 별칭인 ‘오옥결(烏玉玦)’의 약칭으로, ‘단산오옥(丹山烏玉)’은 ‘단양 먹(丹陽 墨)’이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세종실록(世宗實錄)」이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에서 “단양군(丹陽郡)은 본래 고구려의 적산현(赤山縣)인데 신라 때에 그대로 따라 내제군(柰堤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으며, 고려 때 단산현(丹山縣)으로 고치었다 … 토산(土産)은 산개(山芥)·송이(松茸)·신감초(辛甘草)·먹(墨)<가장 좋은 墨을 ‘丹山烏玉’이라 한다> 등이다”고 기록하고 있는 데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에 이미 먹을 사용하고 있었다. 도종의(陶宗儀)의 『철경록(輟耕錄)』에 의하면, 고구려가 송연묵을 당에 세공으로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또 원나라 육우(陸友)가 지은『묵사(墨史)』에는 “고려가 공납한 먹 중에 맹주(猛州)의 것이 상이고 순주(順州)의 것이 그 다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상의 기록을 통해 볼 때 맹주, 순천, 단양이 우리나라 주요 먹 생산지였으며, 단산오옥의 명성은 조선시대까지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청주 명암동 출토 ‘단산오옥’명 고려 먹”은 이러한 고려 먹의 구체적인 양상을 보여 주고, 전통 먹의 연구에 귀중하게 활용될 수 있는 문화재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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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정 초상 및 함]  좌로부터 최석정 (보물  )신숙주, 정호의 초상화

 

보물을 소개하여 보면 최석정의 초상화만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윤증(尹拯), 남구만(南九萬) 등과 함께 소론(少論)의 영수로 활약하면서 모두 8차례의 영의정을 지내며 정계와 사상계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작품은 오사모에 녹색 관복단령을 입고 두 손을 소매 속에 모아 잡은 채 교의에 앉아 있는 전신좌상이다. 의좌에는 표범가죽을 걸쳤고 화문석이 깔린 족좌대(足座臺) 위에 흑피혜(黑皮鞋)를 신은 두 발을 올렸다. 쌍학흉배(雙鶴胸背)에 정1품의 품계를 지닌 관료만이 맬 수 있는 서대(犀帶)를 착용하였다. 안면부는 선으로 이목구비의 윤곽을 그린 뒤, 선묘에 붙여 미세한 색감을 가미하는 선염법으로 채색하였다. 선묘는 얼굴 전체의 입체감을 고려하여 최소화하였으며, 기본적으로 선염에는 서양화법에서 유래된 음영법이 적용되었다.

전체적으로 17세기 공신도상에서 보이는 다소 경직되고 괴체감이 두드러지는 신체표현에서 벗어나 좀더 자연스러워지는 경향을 나타내기 시작하는 18세기 초엽 초상화의 드문 사례로서 중요한 작품이다. 조선 후기 정치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수학자로서 커다란 업적을 남긴 최석정이란 인물의 초상으로 의미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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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신한첩(淑明宸翰帖)]

 

『숙명신한첩(淑明宸翰帖)』은 효종(孝宗, 1619~1659), 현종(顯宗, 1641~1674), 인조계비 장렬왕후(莊烈王后, 1624~1688),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 1618~1674)가 효종의 셋째딸 숙명공주(淑明公主)에게 보낸 한글어찰을 모은 첩이다. 숙명공주는 청평위(淸平尉) 심익현(沈益顯, 1641~1683)과 혼인하였다. 수록된 어찰은 효종 7통, 현종 2통, 장렬왕후 2통, 인선왕후 54통 등 모두 65통이다. 현재 제1면은 따로 떼어져 액장(額裝)되어 있으며, 제2면은 분실되었으나 사진은 남아 있어 원래 66통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어찰첩은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의 «신한첩(宸翰帖)», 오죽헌시립박물관의 “명안공주관련유물”(明安公主關聯遺物, 보물)로서 현종, 명성왕후(明聖王后, 1642~1683), 숙종의 한글어찰을 수록한 «어필첩(御筆帖)»등과 함께 조선왕실의 한글어찰을 살필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 또한 한글서체 변천과정에서 고체(古體)에서 궁체(宮體)로 가는 과도기라고 할 수 있는 17세기 대표적인 필적이 다수 수록되어있어 관련분야 연구 자료의 기준이 되는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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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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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보 제 375 호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시내에 국보인 철당간이 서있다.  당간 지주로는 많이 남아있으나 지주가 함께 서있던 것은 지금의 기억으로는 갑사의 철당간 그리고 담양의 객사리 석당간이 전부이다. 당간지주를 세우게 된 동기와 과정이 기록된 것은 박물관과  현장의 것 중 어느것이 진품인지 확실히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박물관이 모조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간이 서 있는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는 예전에 용두사라는 절이 자리잡고 있던 곳이다. 용두사는 고려 광종 13년(962)에 창건되었으나 고려말의 잦은 전쟁과 난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고, 절이 있던 터는 현재 청주시내의 가장 번화한 거리로 변하였다. 이 당간은 밑받침돌과 이를 버티고 있는 두 기둥이 온전히 남아 예전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두 기둥은 바깥면 중앙에 세로로 도드라지게 선을 새겨 단조로운 표면에 변화를 주었다. 그 사이로 원통 모양의 철통 20개를 아래위가 서로 맞물리도록 쌓아 당간을 이루게 하였고, 돌기둥의 맨 위쪽에는 빗장과 같은 고정장치를 두어 당간을 단단히 잡아매고 있다. 특히 세 번째 철통 표면에는 철당간을 세우게 된 동기와 과정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원래는 30개의 철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당간을 세운 시기는 절의 창건과 때를 같이 하는 고려 광종 13년(962)으로,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어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또한 당간이 남아 있는 경우가 드문 우리 문화재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곳과 함께 공주 갑사, 안성 칠장사의 세 곳에서만 철당간을 접할 수 있어 보기 드문 작품이다.

예로부터 청주에는 홍수에 의한 재난으로 백성들의 피해가 많았는데, 어느 점술가가 이르기를 큰 돛대를 세워 놓으면 이 지역이 배의 형상이 되어 재난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결국 이곳에 돛대 구실을 하는 당간을 세워 놓으니 재난을 피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청주를 주성(舟城)이라 이름하였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시내를 벗어나 증평 방향의 길을 접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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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여래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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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여래삼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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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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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재 1941호 청주 비중리 석조여래삼존상 및 석조여래입상 ]

 

이곳 비중리로 안내판을 따라 동네로 내려서면 길가이 낮은 언덕의 전각을 볼 수 있다. 이곳에 보물인 석조 여래 삼존상과 석조여애 입상이 자리한다. 길 주변에 주차공간이 없고 진입로가 명확하지 않아 다소 불편하다. 주변 하수시설 공사로 더욱 불편불하. 다만 전각과 주변은 울타리와 주변 환경이 잘 정리되어 있다. 느낌이지만 역사적인 귀중한 문화재이지만 원형의소실이 많이 되어 안타까움을 느기게 한다.

청주 비중리 석조삼존불좌상은 하나의 돌에 광배와 불·보살 삼존, 방형의 사자좌를 두터운 환조에 가깝게 조각하였다. 현재 좌협시 보살상은 결실된 상태이다. 본존불은 대좌의 좌우에서 두 마리 사자(獅子)가 위풍당당하게 앉아 불상을 호위하고 있는 방형의 사자좌에 앉아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의 손짓을 지은 것으로 생각된다. 여래상이 앉아있는 사각형의 대좌는 본래 두마리 사자가 양옆에 서 받치고 있는 형태이었으나 현재는 오른쪽사자의 꼬리 부분 정도만이 명확하게 구분된다. 여래의 옷자락은 대좌 아래까지 늘어져 있다. 여래와 협시보살이 하나의 광배를 배경으로 구성된 삼존 형식은 삼국시대 6세기 중반을 전후한 시기에 크게 유행하였으며, 방형의 사자좌 역시 삼국시대 이른 시기에 유행했던 대좌의 형식이다. 우협시 보살상은 무거운 관식(冠飾)과 탐스러운 보발(寶髮)이 어깨 위로 늘어졌고, 목에는 끝이 뾰족한 첨판형의 목걸이를 착용하였다. 천의는 허벅지에서 X자형으로 교차한 고식의 천의(天衣)로, 6세기 전반기 좌우 뻗침이 강한 표현과 비교해 많이 누그러져 6세기 중반 경의 불상양식이 반영된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남아있는 불상도 네부분으로 조각난것을 복원한 것인데, 여래상은 얼굴과 왼편 일부가 오른쪽 불상은 발목이하와 대좌부분이 파손되었다. 가운데 여래상의 양옆에는 화불이 있는데 현재는 오른쪽 5구는 완전하나, 왼쪽은 한 구만 남았다.

현재 남아있는 삼국시대의 대형 석조 불상 중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이자 매우 희귀한 사례로 당시 지역의 역사와 문화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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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여래입상] 

 

별도로 조성된 석조여래입상은 얼굴부분이 파손되었고, 광배와대좌도 남아있지 않다. 두꺼운 놋을 입어 신체의 굴곡이 드러나지 않으며, 왼손을 위로 오른 손을 아래로 하여 손바닥을 보이고 있는 것과 옷자락을 양쪽으로 뻗치고 잇는 것이 특징이다.

 

이곳은 전각과 불상 그리고 큰 바위로 이루어진 구릉에 나무도 아름드리로 크고 전체적인 모습이 신비롭게  느껴진다. 바람이라면  오래전의 모습을 완벽한 재현을 할 수는 없겠지만, 삼불상이 존재하고 받침대의 사자상이 있는 모습을 고증하여, 예상도나 예상 조형물을 너른 이공간에 설치하여 보는 것은 어떨지 생각해본다. 다소 외지고 주변에 큰 사찰이나 관광지와 연계성이 적고, 또한 석조불상들의 마모가 심하고 민가와 너무 가까워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기는 쉽지 않으나, 상상도나 재현품이 많들어지면 낳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실제 원래의 모습은 어떨가 궁금하고, 그 모습이 다른 삼존상보다 규모나 구성이 빠지지 않아  관심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며 나라도 한번 그 모습의 상상도를 그려볼까 하는 생각을 하며 귀가한다. [나만의 문화유산해설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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