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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一同行 쉰일곱번째 - 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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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如一同行 쉰일곱번째 - 부여

박물관특별전 으로 들어선다. 본관에서 받은 방역절차를 거치면 팔찌를 지급하여 별도의 절차없이 들어 서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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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 '백제인, 돌을治石 다스리다'기간 2021-12-21~2022-05-08, 장소 국립부여박물관 기획전시관 내용들은 초기 인류가 찾은 도구의 소재입니다. 돌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으며, 쉽게 변하지 않는 소재이기도 합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 생활 곳곳에서는 지금도 돌로 만든 물건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백제권역에서는 보령 납석과 익산 황등석과 같이 품질 좋은 돌 산지가 많았습니다. 거기에 더해 좋은 돌을 찾아내는 눈, 돌의 성질을 이해하는 능력, 섬세한 손기술을 지닌 장인도 많았습니다. 그 덕분에 백제에서는 돌을 이용한 다양한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전시장으로 들어서면 입구에 보령 납석과 익산 황등석에 대한 설명과 돌을 다듬는 도구 그리고 각종 돌을 다듬는 기법을 적은 불상 부터 큰 성벽 축조에 사용 되는 돌을 관리하는 거에 대한 설명이 되어있어, 백제의 돌가공에 대한 많은 지식을 전해준다.  전시장의 중앙에는 예산 화전리 석조 사면 불상이 복제 설치되어 있고 이에 대한 설명으로 인해 볼거리와 알거리를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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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실내부에 사면괘불의 복제품과 이에 대한 설명이 잘 되어 있다. 예산의 사면불상을  실제 방문하여 본일이 있지만, 전각 속에 나무로 된 창살 속의 모습으로 그 불상의 가치를 잘  느끼기 힘들었는데, 사실감은 없지만 이번의 복제품은 빙둘러 관람이 가능하여 오히려 그 모습을 보기 쉽게 만들어 놓았다. 이 전시회는 백제의 특징의 돌에 대한 소개와 돌을 다듬는 원리, 도구, 성을 쌓을대 쓰는 돌의 가공에서 사면 괘불의 소개 그리고 돌로 다듬어진 석불, 집의 나타내는 등 다양하게 전시하고 옛백제 시절의 석재를 다루는 것과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시간이 흐른 돌가공 불상을 보며 시간의 경과로 인한 마모나 소실 부분이 복원된 모습을 재현 해 놓은 것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탑은 복원을 통하여 원형을 복원하려 한 것을 많이 볼 수있으나 부처님의 불상은 쉽게 복원으로 채워 넣기가 힘들기 때문에, 원형으로 예상되는 것을 다시 제작하는 것은 문화재 보전과 다른 의미일까.

전시장 내부에 있는 보물을 찾아본다. 본관 전시실에 전신되었던 것이 이번 돌 특별 전을 위해 이곳에 옯겨 온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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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부여 사택지적비]

 

이곳에 전시되어 있는 부여 사택지적비는 백제 의자왕대의 인물인 대좌평 사택지적이 은퇴 후 절을 세운 것을 기념하여 만든 것이다. 비석의 형태를 갖춘 유물로서 백제인의 손으로 제작된 유일한 경우이다. 특히 대성팔족(大姓八族)의 하나인 사택씨(沙宅氏) 출신의 사택지적(沙宅智積)은 "일본서기"에서 대좌평(大佐平)의 지위로 왜국에 사신으로 파견된 사실이 확인되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사찰의 전각(殿閣)과 탑상(塔像)을 조성하며 새긴 비석인 만큼, 문화적・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생각된다.

사택지적비는 백제 후기 귀족들의 삶과 사상을 이해하고 백제 관등을 이해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또 격조 높은 문체와 서법은 백제의 수준 높은 문화를 잘 보여준다.

이곳에는 다수의 석조불이나 석조 가공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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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하지 못한 다수의 전시물을 뒤로 하고 박물관을 나선다. 야외전시실에도 오래전부터 보아온 탑과 석조불, 그리고 석상들이 전시되어있다. 언젠가는 보물로 지정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관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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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로부터 동사리석탑, 석탑, 동남리오층석탑]

 

동사리 석탑 : 원래 부여군 세도면 동사리에 있던 것을 1971년 부여읍 쌍북리로 옮겼다가 1993년에 다시 박물관으로 옮겨 세웠습니다. 석탑은 2층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쌓은 구조입니다. 아래층 기단 네 면에 각각 3개씩의 안상을 새겨 장식하였습니다.

위층 기단 덮개돌(상층기단 갑석)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긴 탑신받침이 있으며, 네 모서리에는 돌출된 꽃장식이 있습니다. 탑신은 1층 탑신에 비해 2층 탑신부터는 급격히 작아졌습니다. 1층 탑신에는 네모난 구멍을 뚫었는데, 불상 등을 안치하기 위한 감실의 일종입니다. 이 석탑은 연꽃무늬 탑신 받침이나 2층 탑신 이상의 급격한 축소, 탑신에 새긴 감실 등은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면서 단정함을 잃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고려전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동남리 오층석탑은 부여 석목리 논절마을의 한 절터에서 박물관으로 옮긴 것입니다.

2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쌓은 5층석탑인데, 현재는 기단 일부와 4층 탑신이 없어진 상태입니다. 동남리석탑은 2층 기단과 다층의 탑신으로 이루어진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을 계승하면서도, 탑신의 폭에 비해 높이가 높은 전형적인 고려시대 석탑의 모습을 띄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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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석조여래 입상]

 

고려시대 불상으로 부여 금성산의 천왕사 절터에서 발견되어 이곳 부여 박물관으로 옯겨온 불상이다.  얼굴은 크고 비만하게 표현만 반면 신체는 밋밋하게 표현하였으며, 특히 몸과 머리의 폭이 거의 비슷한 돌기둥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석주형의 석불은 논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 당진 안국사지 석불입상, 익산 고도리 석불입상 등 고려 전기 충청·전라지역에서 유행하는데 이 석불 역시 그러한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사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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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전시 석불들]

 

이곳 야외 전시장에도 두개의 보물이 전시되어 있다. 그하나는 고려시대 원명국사의 비와 당나라 장수의 전쟁 승리를 기념한 전승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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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 107호 부여 보광사지대보광선사비]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이 비는 부여군 임천면에 있던 보광사(普光寺)의 중창을 기념하여 건립한 비석으로 중창을 주도한 원명국사(圓明國師) 충감(沖鑑 : 1275~1339)의 행적과 중창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원래는 충남 부여군 성주산의 보광사터에 있던 것을 1963년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비문은 2차에 걸쳐 새겼는데, 앞면은 건립당시인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새겼고 뒷면은 조선 영조 26년(1750)에 추가하였다. 비문에 의하면 원명국사는 19세에 등과하여 선원사에서 뜻을 펴오다가 공민왕 원년(1351) 65세로 입적하였다. 죽으면서 문도들에게 비나 탑을 세우지 않도록 당부하여 6년이 지나서야 비가 세워졌다. 뒷면의 추가된 기록에는 임진왜란 때 건물이 모두 불타 없어지고, 기록을 적은 비도 알아볼 수 없으므로 주지인 석능일이 고쳐 새긴다고 되어있다. 현재 비받침과 비머릿돌이 없고, 비몸만 남아있다. 비몸의 가장자리는 덩굴무늬를 띠 모양으로 둘러 새겼다. 석재는 편마암이고 윗쪽의 양끝을 사선으로 잘라냈다. ‘보광사중창비’라고도 하는 이 비는 고려 후기의 간략화된 석비양식과 불교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이웃하며  있는 당장수 유인원의 기공비는 왠지 답답한 마음을 갖게 한다. 먼저 전각안에 있는 이 비는 그 모습 자체도 눈에 익숙하지 않다. 또한 비의 재질도 익히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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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21호 유인원 기공비]

 

박물관 마당에 선사비와 이웃하여 유인원 기공비가 있다. 유인원은 낭장(郎將)의 벼슬로 사비성이 함락된 이 후 (660년)군사 1만을 가지고 사비성에 남아 지킨자이다. 당나라 장수 유인원(劉仁願)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碑)이다. 부소산에 세 조각으로 깨진 채 흩어져 있던 것을, 그 자리에 비각을 세워 복원해 두었다가 해방 후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 놓았다. 비는 비몸돌의 앞면이 조금 깨어져 나갔고, 머릿돌도 부분적으로 깨어져 있으며, 비문은 몸돌 앞·뒷면에 새겨져 있으나 심하게 닳아 있어서 알아보기가 힘들다. 누군가가 후세에 망실 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비 몸돌과 머릿돌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머리부분은 각이 없이 둥글다. 특히 머릿돌은 여섯 마리의 용조각이 매우 사실적인데, 좌우 양 쪽에서 세 마리씩의 용이 올라가 서로의 몸을 휘감고 중앙에 있는 여의주를 서로 다투고 있다. 이는 당나라 전기의 화려한 수법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비문은 유인원의 가문과 생애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그의 생애에 대한 부분은 주로 그가 당나라 태종에 의해 발탁된 이후의 활동상을 적고 있다. 그는 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뛰어난 공을 세웠으며, 660년에 소정방과 더불어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킨 뒤 백제유민들의 부흥운동도 평정하였다. 그 이후의 행적은 비문이 지워져 더 이상 알 수 없다.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서는 이 비문을 유인원이 썼다고 하고 있으나, 이 설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비가 세워진 시기는 통일신라 문무왕 3년(663)으로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에 비문을 새긴지 3년 후이다. 비록 당나라 장수의 공적비이기는 하지만 비문 중에 의자왕과 태자 및 신하 700여 명이 당나라로 압송되었던 사실과 부흥 운동의 중요 내용, 폐허가 된 도성의 모습 등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상황을 아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박물관을 나서 정림사지로 자리를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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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사지]

 

마지막 접한 보물이 당나라의 기공비이다. 수조, 기공비를 통해 백제의 멸망에 깊숙히 관계한 당나라 장수 들이 자신의 공적을 드러내는 것을 보며, 이번에는 자신의 공적의 흔적 남기기의 끝판 왕인 부여 정림사지 오층 석탑을 안보고 갈 수는 없었다. 박물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정림사지가 있다. 봄날은 걸으며 이동하는 것도 좋을 거리이다. 다소 늦은 시간이라 정림사지 박물관은 관람이 불가하고 정림사지만 관람가능하다는 안내를 받는다. 삭막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탑으로 향하니 덩그라니 놓인 탑과 저멀리 전각을 품은 정비된 사지가 더욱 설렁하게 느겨진다. 주변에 인적도 드물다.  듬직한 석탑으로 크기나 모양으로 그 위용을 뽐내는 백제 대표적  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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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새겨놓여진 글귀]


오늘은  바람이 매섭게 불어 사진에 담으려고 내놓은 손끝이 시려온다.  탑에 당나라 소정방이 글귀를 새긴 것이다. 곳곳에 흔적을 남겨야 하는 인간의 행동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한다. 고구려비, 진흥왕순수비 등의 비와 승려의 부도비, 그리고 심지어 마을의 회의 내용을 새긴 매향비, 신라비도 그들의 흔적을 돌에 새긴 것인데, 대군을 이끌고 한나라를 정벌한 사람으로서 그 치적을 글로 남기고 싶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것의 기록 들이 오늘날 역사적으로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게 하는 사료로 인정받아, 후에 보물로 지정 보호되기도 하니, 그리 탓할 일 만은 아닌 것이다. 오늘날은  타국의 문화재에 예를 들어 만리장성의 벽돌, 엘자베스의 동상에 다녀간 자기이름을 새긴다면 지탄을 받겠지만, 예전의 낙서는 그 당시의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면 보물의 가치를 부여되는 것도 넌센스이다. 설령 남긴 당시의 기록이 주관적 일지라도, 여타의 문헌과 비교 검토로 해석으로 인한 귀중한 사료가 될 수 있으니, 순간 헛 웃음을 나게 한다. 많은 비문이나 부도이외,  유독 산속 절벽바위에 흔적을 남기기를 좋아하는 민족으로 이탑에 글을 남긴것은 그만큼 이탑이 백제를 대표하는 대단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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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9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은, 좁고 낮은 1단의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너른 마당이라 춥다는 느낌에 전각을 향한다. 무엇이 변했는지 알수는 없으나, 전각안에 덩그라니 놓인 불상을 접한다


탑과 마주보는 전각으로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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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108호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 ]


이 전각내부에는 크기가 상당한 불상이 자리한다. 충청남도 부여의 정림사지에 남아 있는 석조불상으로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과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다. 정림사는 6세기 중엽에 처음 창건되어 백제 멸망 때까지 번창하였던 사찰로 고려시대에 다시 번창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석불상은 고려 때의 번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의 머리와 보관은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만들어 얹은 것으로 보인다. 신체는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형체만 겨우 남아 있어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을 알아보기 어렵지만, 어깨가 밋밋하게 내려와 왜소한 몸집을 보여준다.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왼손의 표현으로 보아 왼손 검지 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쥔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상대·중대·하대로 이루어진 8각으로 불상보다 공들여 만든 흔적이 역력하다. 상대는 연꽃이 활작 핀 모양이며, 중대의 8각 받침돌은 각 면에 큼직한 눈모양을 새겼다. 하대에는 연꽃이 엎어진 모양과 안상을 3중으로 중첩되게 표현했다. 현재 불상이 자리잡고 있는 위치가 백제시대 정림사지의 강당 자리로 이곳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해 이 작품은 고려시대에 절을 고쳐 지을때 세운 본존불로 추정된다.

 

이곳의 너른 전각안에 앞뒤로 열린 문을 통한 빛을 통해 커다란 불상을 대한다. 크기로 인해 태양의 각도에 따라 빛을 받는 부분이 달라, 윗부분이 어두워보이고 전체적으로 음침하다는 분위기를 연출 한다. 예전의 강당이란 건물터에 덩그라니 놓인 불상의 바닥이 시맨트로 되어 있어 내부가 더욱 썰렁하다는 느낌이다. 이곳이 강당이었으며 옛 절의 본존불 이었다면, 마루바닥은 목재로 갈아주는 것이 어떨지, 그리고 이곳 내부에 조명장치에 대한 연구가 있었으면 한다. 입장료를 내고 관람하는 관광객이 이곳이 사지임을 알고 오더라도, 뭔가 활량함 속에 홀로 존재하는 탑과 너른 전각에 놓인 것 같은 석조여래에서 느끼는 썰렁함은 박물관을 운영하여도 그리 좋은인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논산의 보물은 장하리의 삼층석탑과 무량사에 여럿 있다. 무량사 오층석탑, 석등, 극락전, 미륵불 괘불탱, 삼전패, 소조아미타여래 삼존좌상 이 있다. 그리고 많은 유형문화제를 보유한다.

추운 날씨로 인해 이 들의 방문을 보류한다. 이번은 이전 방문시 보지 못한 훌륭한 전시실에 전시된 백제 금동 대향로를 홀로 즐긴 것만으로 만족한다. 세월이 흐르니 문화제도 그 모습이 복원으로 변할 수도 있고, 잘 전시되어 가치를 높이는 것도 있고, 보존을 위한 노력들이 이곳 저곳에서 보이는 것을 느끼고,  각종 전시회를 위해 국보와 보물이 이곳 저곳을 옮기며 전시되는 것을 통해,  뜻하지 않는 곳에서 다른 곳의 보물을 접할 수 있게 되는 행운도 얻으니, 우리는 많은 정보가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슴을 새삼느끼며 따듯한 집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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