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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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一同行 백 쉰 여섯번째 - 서울찾아가 보기 어려웠던 보물을 찾아 길을 나선다. 경복궁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결국엔 청와대에 도착한다. 예약제로 운영되는 이곳은 2022년 5월 부터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를 이전하면서 개방되어 출입할 수 있어 그동안 만나기가 힘든 보물을 접할 수 있어 찾아보는 기쁨이 있다.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더보니 정문이 아닌 춘추관의 문으로 입장하게 된다. 춘추관을 들어가 1층의 브리핑 장소를 들려본다. 춘추관을 통해 산책길을 따라 걸으니 언덕에 잘 지어진 한옥이 보여 발길을 옮긴다. 침류각이 청와대 관저 뒤편의 산책로에 자리한다. 침류각은 그리 크지 않은 건물로, 정면 4간, 측면 2칸으로 주춧돌과 기둥이 사각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에, 처마는 겹처마에 경포는 없다. 단청도 현판도 없으나, 세살무늬와, ‘亞’자 형 무늬의 문살은 화려하다. 서울시 유형문화재이며, 건축 연대는 정확하지는 않다고 한다. 용도가 궁금한 건물이나 그대로 발길을 옮긴다. 언덕을 오르면 자그마한 정자가 자리한다. 현재의 ‘오운정(五雲亭)’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분분하다고 한다. 원래 존재하던 오운각이 오운정으로 이름만 바뀌었다는 설도 있고, 경무대가 들어선 이후에 오운정 건물을 새로 지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 뒤로도 오운정은 별일 없이 남아있었다가, 1989년에 오운정 자리에 지금의 청와대 본관을 지으면서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고 한다. 오운정을 지나 걷다 보면 그리도 보기 힘들었던 석조불 앞에 도착한다, 오운정에서도 이곳에서도 지키는 젊은 이를 보게된다. 왠지 모르게 불상에 비해 작은 전각을 보며, 작은 공간에 자리한 불상이 그 크기에 어울리지 않아 측은한 느낌을 갖게 한다. 이 불상은 신라시대 석조여래좌상으로, 이곳에 자리한 사연이 경주에서 일제강점기 때 총독관저로 이동된 이후 100여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자리를 지켰다고 한다. 정확환 날은 알 수 없지만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경주 남산의 옛 절터에서 처음 발견하고, 이후 1927년에 조선총독부 관저를 지으면서 한국의 국보를 관저에 함께 세워놓자는 의견에 따라 이 불상을 총독관저로 옮겼다고 한다. 이는 통일신라 시대인 9세기에 경주 남산의 어느 사찰 (학계에서는 유덕사有德寺 또는 이거사移車寺로 추측)에 모셔진 석조 불상이어서, 이 불상을 고향인 경주로 돌려보내 달라고 요청되어 있다고 한다. 다만 경주 어디에 있었는지 정확한 위치를 확신할 수는 없어서 반환이 쉽게 성사되지 못하는 듯 한데, 경주의 문화재 중 출토지 미상이거나 원래 위치에 있을 수 없는 건 대부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어, 국립경주박물관에 갈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은 불상 높이 108cm, 방형 대좌 93.5×91.1×24.5cm인 통일신라 9세기에 조성된 석불좌상으로, 편단우견에 항마촉지인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중대석과 하대석은 손실되고 다른 곳은 손상 없이 보존되어 있다. 균형 잡힌 신체 비례와 풍부한 양감이 돋보이며, 섬세한 부채꼴 옷주름 등에서 석굴암 본존상을 계승한 통일신라 불상조각의 높은 수준으로 2018년 보물로 지정된다. 현존하는 통일신라 석불 중 머리와 몸체가 하나로 완전하게 갖추었을 뿐 아니라 연꽃문양을 새긴 사각형대좌는 동시기 불상 중에서 사례를 찾기 힘드는 9세기 통일신라 불상을 대표하는 불상이라고 한다. 2020년 6월 3일, 이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과 꼭 닮은 신라시대 석조 불상의 불두가 경주 남산에서 발견되고. 청와대 불상이 처음 발견되었다고 추정하는 지역에서 10 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는데, 발견 당시 불상의 목과 몸통이 분리된 채였다고 한다. 산길을 내려서니 청와대 현관앞에 당도한다. 안으로 들어서니 웅장한 작품을 마주한다. 2층을 오르는 계단에 금수강산도가 자리하고 계단엔 붉은 양탄자가 깔려 있는 것이 위용있고 인상적이다. 청와대 내부의 모습을 둘러본다. 많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책임지어 온 대통령이 집무를 보던 자리도 둘러본다. 내부에 전시된 전시품들을 둘어본다. 푸른 색이 강렬한 어촌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자리하고 있다. 오랜간 나의 눈길을 잡는 한국화가 계단 아래 자리한다. 본관 충무실 입구에는 ‘아애일일신지대한민국(我愛日日新之大韓民國)’(이수덕)이라는 10폭 병풍이 배치되어 있다. ‘나는 나날이 새로워지는 대한민국을 사랑한다’라는 제목의 이 커다란 서예 병풍은 힘차게 눌러쓴 예서체의 글씨로 북에 두고 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통일을 기원하는 마음, 조국애 등을 담고 있다고 한다. 철농 이기우 선생의 글씨 '공심여일월(公心如日月)'이 걸려 있다. '공심여일월(公心如日月)'은 (나라와 국민을 위하는) 공평한 마음은 해와 달처럼 치우침 없이 두루 비춰야 한다는 뜻이다. 청와대 투어를 마치고 지친 몸으로 귀가를 택한다. 청와대와 경복궁 두 곳을 관람하기에는 발품을 많이 팔아야 한다. 오늘 방문한 2곳은 조선의 궁궐과 대한민국의 대통령 집무실인데 현재의 모습에 가려진 일본의 만행을 접하다 보니 마냥 신나지 만은 않은 기분이다. 현재의 삶에 충실하여 후손에게 우리의 온전한 혼과 자부심이 생기는 힘을 물려 주어야 하여야 한다. 지난날을 교훈 삼아 국방을 튼튼히 하는 국가가 되길 바라며 귀가길을 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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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一同行 백 쉰 다섯번째 - 서울경복궁의 경전과 내전을 거쳐 담밖으로 나선다. 담장을 장식하는 문양을 바라보며 넋을 빼앗기다가, 차가운 날씨에 정신 차려 후원으로 향한다. [담장] 발길은 북쪽으로 연뭇 위의 섬 속에 자리한 향원정을 찾아 나선다. [보물 제 1761호 경복궁 향원정] 2012년 보물로 지정된 향원정은 북쪽 후원의 향원지 연못의 육각형의 정자이다. 이 곳에는 원래 세조 2년에 취로정(翠露亭)이란 정자를 지었다는 것이 「세조실록」에 있다 하는데, 연못의 크기는 4,605㎡, 모서리가 둥근 방형의 연지로, 수원(水源)은 북쪽 언덕에서 솟아나는 '열상진원(洌上眞源)'이라는 샘물이라 한다. '취향교'는 6·25전쟁 없어지나, 1953년에 향원정 남쪽에 석교로 사용되다가, 2012년에 발굴조사를 거쳐 향원정 북측의 제 위치에 원 모습인 목교로(길이 32m,폭 165cm)로 복원 하였다고 한다. 향원정은 고종이 아버지 흥선대원군으로 부터 정치적 자립의 일환으로 1873년 건청궁을 지으면서, 그 건청궁 앞에 연못을 파고, 가운데 섬을 만들고 세운 2층 정자로 1885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향원정의 평면은 정육각형으로 아래·위층이 똑같은 크기로, 낮은 기단 위에 육각형 초석을 놓고, 그 위에 일층과 이층을 관통하는 육모기둥을 세웠다고 한다. 공포는 이층 기둥 위에 있으며, 일층 평면은 평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이층 바닥 주위로는 계자 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두었으며, 천장은 우물천장이며 모든 칸에는 완자 살창틀을 달았다고 한다.처마는 겹처마에 육모지붕이며, 중앙의 추녀마루들이 모이는 중심점에 절병통(節甁桶)이 있다. [ 향원정] 연못을 한바퀴 돌아보고 건천궁으로 다시 와서 내부를 둘러본다. 건청궁(乾淸宮)은 1873년 역대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御眞) 등을 보관 할 목적으로 지어졌으며,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이 있기까지 고종과 명성황후의 거처로 사용 되었다 한다. 을미사변 이듬해인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 후, 일제는 1909년 건청궁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미술관을 지었고, 해방 후 한동안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다가 1998년에 철거된다. 2007년 10월 18일 일제가 철거한 건청궁이 복원된다. [건천궁의 장안당] 건청궁은 창덕궁 연경당 및 낙선재와 더불어 일반 사대부의 저택과 유사하게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된 건축 형식을 지니고 있으며, 장안당(長安堂)은 고종황제의 침전으로 27칸, 측면 3칸, 7량의 건물이다. 장안당에는 북행각과 동행각이 딸려 있는데 북행각은 1887년 미국의 에디슨 전기회사가 발전기를 설치해 한국 최초로 전깃불을 밝힌 곳으로 유명하다. 을미사변 당시, 고종은 이 곳에 감금된 상태였다고 전해진다. [곤녕합, 옥호루] 왕비의 처소 인 이 곳은 1895년(고종 32)에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 된 곤녕합 옥호루(玉壺樓)이다. 이 장소에서 처참한 일이 일어 났음을 알게 되어 마음이 무겁워 이내 자리를 벗어난다. 발길을 경회루를 향해본다. [국보 224 호 경복궁 경회루] 1985.01.국보로 지정된 근정전 서북쪽 연못 안에 세워진 건물로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곳이라 한다. 연못에는 얼음이 얼어 있어 경회루가 얼음판에 반영을 만들고 있다. 경회루는 작은 규모였으나, 왕자의 난으로 경복궁에 있기를 거부하여 창덕궁을 다시 지은 조선 태종이 경복궁을 법궁으로 여기며, 천민 출신인 박자청에 지시하여 연못을 넓히면서 다시 지었다는데, 연못을 팔때 나온 흙은 교태전 뒤의 뒷동산을 만드는데 사용 하였다고 한다. 이 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돌기둥만 남은 상태로 오다가, 270여 년이 지난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경회루도 다시 지었다고 한다. 연못 속에 잘 다듬은 긴 돌로 둑을 쌓아 네모 반듯한 섬을 만들고 그 안에 누각을 세웠으며, 돌다리 3개를 놓아 땅과 연결되어 있다. 앞면 7칸·옆면 5칸의 2층에, 팔작지붕이며, 공포는 누각건물의 간결한 형태이다. 1층 바닥에는 네모난 벽돌을, 2층 바닥은 마루를 깔고, 마루의 높이를 3단으로 각각 달리하여 지위에 따라 맞는 자리에 앉도록 하였다고 한다. [ 경회루의 기단부와 다리] 1층 기둥이 전부 화강암이며, 2층은 외부와 통한 외진과 내부 공간인 내진, 그리고 중심에 중궁 부분으로 구분된다고 한다. 각 공간 사이마다 문이 있고, 문을 전부 들어올려 한 공간이 된다. 경회루의 바깥 돌기둥은 네모나고 안쪽 돌기둥은 둥근데, 이는 땅은 모나고 하늘은 둥글다는 천원지방(天圜地方) 사상을 나타내고, 전체 기둥은 총 48개로 바깥 24개, 안쪽 기둥이 24개인데, 이는 24개절과 24방을 의미한다고 한다 고 한다. [국보 경복궁 경회루] 멀리 경회루의 옆면에 호수로 이어진 계단이 보인다. 이 곳 연못에는 화재를 방지하기 위하여 청동 용 2마리를 넣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1997년 연못 공사를 위해 연못의 물을 뺐을 때 하향정 근처에서 1마리가 발견되어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되었지만, 나머지 한 마리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하향정] 하향정은 이승만 대통령이 여가와 휴식을 위해 1959년 지어졌다고 하는데, 경복궁의 원형 보존은 1869년 고종때를 기점으로 해야하여 철거해야 한다는 지적과 이미 50년이 지나고, 문화재로서 가치가 있으며, 경회루 미관을 해치지 않으니 보전하자는 논란이 있었던 건물이다. 적적한 담장 한켠에 광복 후 우리의 손으로 지어진 새 건물이라는 것도 역사적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보물 제 846호 경복궁 풍기대]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재는데 사용되던 깃발을 꽂는 대이다. 화강암 의대를 놓고, 구름무늬를 새긴 8각기둥을 세운 모습으로, 크기는 아랫단의 높이가 80.8㎝, 위 8각 기둥의 높이가 143.5㎝로 전체 높이가 224.3㎝라 하며, 기둥의 맨 위의 중앙에는 깃대를 꽂는 구멍이 있고, 기둥옆으로 물이 고이지 않게 배수구멍이 있다고 한다. 꽂는 깃대 길이는 알 수 없고, 깃대 끝에 긴 깃발을 매어 날리는 방향으로 풍향을 재고 나부끼는 정도로 바람의 세기를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이 풍기대는 18세기 것으로 여겨기며, 궁궐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그림인 동궐도(東闕圖, 고려대학교박물관소장)에도 풍기대 위에 길게 나부끼는 풍기가 그려져 있어 당시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현재는 창경궁(昌慶宮) 풍기대와 경복궁(景福宮, 224.3㎝) 풍기대가 남아 있다. 시간을 측정하는 앙부일구, 비의 양을 재는 측우기, 이전에 본 하천의 물의 높이를 재는 수표, 그리고 오늘 풍기대를 접하며, 당시 자연의 현상에 의지하며 살아가기 위한 기구의 개발노력에 놀라게 된다. [신무문] 경복궁의 북문인 심무문을 통해 청와대로 향한다. 하루에 둘러 보기엔 몸도 힘들고 맘도 힘든 곳이 이 곳 경복궁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문화와 정통성에 일본의 만행이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다는 생각에 울화가 치민 하루이다. 서서이 잊어 가는 불행한 과거에 대한 망각 속에 잘 복원 된 건물만 보게 되는 현실과 한복을 입고 곳곳에 자리한 중국인 관광객이 오가는 경복궁에서 내가 얻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우리의 문화 숨결을 순간 순간 단절 하게 만든 현장, 국모를 암살한 장소, 그러한 일을 저지른 자들의 총독부 건물이 존재하던 곳을 복원 하였는데, 이 곳은 궁궐이기도 하지만, 각 건물이 왜 새로이 지어지고 어떤 장소에서 어떤 만행이 있었는지, 후세에 알려주는, 지난 역사를 알리는 장소로도 거듭 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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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一同行 백 쉰 네번째 - 서울허리에 문제가 있어 한동안 활동이 힘들었는데, 오늘은 여행의 정리를 기록으로 남기지 못한 것을 찾아 올려 본다. 너무 많은 문화재를 가지고 있는 경복궁을 찾아본 일을 정리 못하다가 지금 소개하고저 한다. 원래의 이번 여행 목적은 청와대와 그 곳에 있는 석불상을 찾아보려 하였는데, 가는 길에 내린 전철역에서 경복궁을 들어가게 되어 광화문의 뒤로 들어서게 된다. 추운 날에도 한복을 차려 입고 이곳을 찾은 외국인 들이 함께 한다. 경복궁은 태조 4년(1395)에 천도후 처음 세운 궁궐로, 정도전이 큰 복을 빈다는 의미로 ‘경복(景福)’이라는 글자로 이름지었다 전한다. 임진왜란(1592)에 불에 탄 것을, 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다시 세우나,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경복궁은 빈 궁궐이 되고, 일제시대를 지나며, 궁궐건물은 근정문·근정전·사정전·천추전·수정전·자경전·경회루·제수각·함화당·집경당·향원정·집옥재·협길당 등이 남아 있었다 한다. 경복궁의 입장권을 구하고 안으로의 진입을 우선하다 보니 복원 된 경복궁과 월대의 모습은 다음 기회로 하고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흥례문으로 향한다. 흥례문은 경복궁의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의 중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목조 건물로, 1395년(태조 4)에 창건되어 1426년(세종 8년)에 집현전에서 ‘예(禮)를 널리 편다’는 뜻의 홍례문(弘禮門)으로 이름을 불리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867년(고종 4년) 경복궁 중건시, 청 고종 건륭제의 휘 홍력(弘曆)을 피하여 지금의 이름인 흥례문으로 되었다 한다. 1916년 조선 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흥례문을 비롯한 주변 행각이 모두 파괴되었다 한다. 금천의 축대 4방향으로 4마리의 서수상이 있는데, 그중 유일하게 혀를 내밀고 메롱하고 있는 익살스러운 메롱해치가 있다. 금천교는 금천을 건너기 위해 세운 돌 다리이며, 영제교는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에 위치한다. 세종 때에는 영제교(永濟橋)’라는 이름을 가졌으나,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은 폐허가 되었고, 영제교는 돌로 만들어져 큰 훼손 없이 270여 년 간 방치되었다가 1865년(고종 2년)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다시 궁궐의 금천교 역할을 수행했다고 한다. 금정전을 들어가는 근정문을 향한다. 많은 사람들로 인하여 맘이 산만하여서 인지 정신줄을 놓고 보물을 접한다. 1985년 보물로 지정 된 근정문은 경복궁 중심 건물인 근정전의 남문으로 좌우에 행각이 둘러싸고 있다. 태조 4년(1395) 경복궁을 세울 때 함께 지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버리고, 지금 건물은 고종 4년(1867)에 새로 만든 것이라 한다. 근정문은 앞면 3칸·옆면 2칸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며, 공포는 다포식으로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건축법이라 한다. 행각은 근정전의 둘레를 직사각형으로 둘러 감싸고 있는데, 양식과 구조는 간결하고 옆문에는 일화문(日華門)과 월화문(月華門)이 있으며, 북측으로는 사정문(思政門), 동·서쪽으로는 밖으로 돌출한 융문루(隆文樓)·융무루(隆武樓)가 있다. 벽에 만든 창의 형태는 사각형의 모서리를 사선으로 처리한 것이 특이하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궁궐 정전의 남문 중 유일하게 2층 건물이라 한다. 1985년 국보로 지정된 경복궁 근정전은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곳이라 한다. 많은 방문객 때문인지, 맘이 딴 곳에 있어선지 그냥 훑어보게 된다. 너무도 많은 문화재가 자리하여 세심하게 보다 보면 청와대 방문에 문제가 있을 까 걱정되고하여 먼발치서 눈에 담고 다음을 기약한다. 태조 4년(1395)에 지었으며, 정종과 세종을 비롯한 조선 전기의 여러 왕들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하기도 하였다는데, ‘근정’이란 이름은 '천하의 일은 부지런 하면 잘 다스려 진다'는 의미로 정도전이 지었다고 한다. 지금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고종 4년(1867) 다시 지은 것이라 한다. 앞면 5칸·옆면 5칸 크기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의 다포식 건물이다. 건물의 기단인 월대의 귀퉁이나 계단 주위 난간기둥에 12지 신상 등 동물상 들을 조각해 놓았으나 이의 관람도 다음으로 넘긴다. 건물 내부는 아래·위가 트인 통층에 가운데에 어좌가 있고, 어좌 뒤에는 ‘일월오악도’병풍을 놓았고, 위는 화려한 장식으로 꾸몄다. 근정전 마당에는 길 좌우에는 문무백관들의 품계석이 차례로 놓여 있으며, 행각이 둘러져 있다. 발길을 옮기다 웅장한 근정전 옆 모습을 대한다. 이곳에서 사정문을 들어서면 사정전이 나온다. 경복궁은 궁궐건축 제도인 전조후침 및 삼문삼조의 기본배치 원리에 따라, 외조, 치조, 연조의 구역으로 크게 나뉘어 지며 각기 제 기능에 따른 전각이 배치되었다고 한다. 예비답사의 마음으로 궁궐의 뒤로 향한다. 근정전 뒤의 사정전은 왕이 평상 시 거처하며 정사를 보살 피던 곳으로, ‘사정’은 ‘선정을 생각하다‘라는 뜻으로 정도전이 작명하였으며, 만춘전, 천추전과 더불어 편전으로서 정사를 보았던 곳으로, 사정전은 태조 4년(1395)에 지어지고, 명종 8년(1553)에 불탄 뒤 재건 하나, 임진왜란때에 소실 되어, 현재의 건물은 고종 4년(1867)에 중건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어칸을 협칸보다 2배 가까운 길이로 넓게 잡았고, 측면에서도 중앙칸을 훨씬 크게 한 것이 특징이며, 기단은 장대석 3벌대 기단이고, 어칸에 소맷돌이 있는 계단이 있고, 원형 초석이다. 가구는 2고주 7량가의 다포식으로, 공포는 4면 모두 어칸에만 2개의 간포를 배설하고, 협칸, 퇴칸은 1개를 설치되어 있다. 포작은 운궁초각으로, 천정은 우물천정에 단청문양이며,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용마루와 내림마루에는 양성을 하고 취두·용두·잡상이 있다. 사정문 그 좌우에는 서쪽부터 천자문의 글자 순서를 따라 천자고~월자고까지 행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궁중의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 이었다고 한다. 사정전의 동측에 만춘전과 서측에 천추전이 있다. 사정전에는 온돌이 없고 만춘전과 천추전에는 온돌이 있어 추운 겨울에는 만춘전과 천추전에서 정사를 보고 경연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사정전 앞에 놓인 앙부일구는 세종대왕이 해가 뜰 때 사용 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며, 비가 올 때는 사용이 가능 하지 않아 물시계도 만들게 된다고 한다. 원본은 고궁박물관에 있으며, 앙부일구(仰釜日晷)는 세종 16년(1434)에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만들었던 해시계로 시계판이 가마솥 같이 오목하고, 이 솥이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특히 세종실록에 글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12지신 그림으로 그려서 시간을 알게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것은 대궐에 두었을 뿐만 아니라 종로 혜정교와 종묘 앞에 설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공동시계라고 한다. 앙부일구의 세로선은 시각을 나타내고, 앙부일구의 가로선은 절기를 나타낸다고 한다. 강령전으로 들어가는 문인 강녕문. 경복궁의 건물로, 임금의 정식 침전이다. 1394년(태조 3년) 경복궁 창건 당시 지어져, 세종 15년 수리, 명종 8년에 화재로 사라진 뒤 재건되고,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고종 4년에 다시 지었는데, 고종 13년에 다시 화재를 입은 것을 고종 25년에 재건하였는데, 일제강점기인 1917년에 불타 없어진 창덕궁 내전을 재건할 때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내전 건물을 자재로 쓰기 위해 해체 이전 지금은 희정당이 된다. 이후 빈 터로 80년 가까이 남아있다가 1995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정면 11칸, 측면 5칸의 1층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장대석의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민흘림 두리기둥에 이익공 공포 양식이며, 툇마루 부분은 긴 돌 기둥을 세워 마치 누각처럼 보이며, 가운데엔 넓은 월대가 있다. 가운데 3칸을 대청으로 놓고 좌, 우 양 옆에 9칸의 온돌방이 있으며, 건물 4면의 가장자리 칸들은 툇마루로 구성하여, 툇마루는 밖으로 출입할 수 있고, 툇간과 대청 사이의 출입문은 위로 올릴 수 있는 분합문으로 개방 또는 분리 가능하게 되어 있다. 강녕전 동, 서에 위치한 보조 침전으로 강녕전과 복도로 통했기 때문에, 경성전은 동북쪽 가장자리 면에, 서북쪽 가장자리 면에 창이 아닌 문이 달려있다. 두 건물은 형태, 건물의 특성이 똑같다. 정면 7칸, 측면 4칸이며, 각각 가퇴가 있었으나 자료가 없어 복원 하지 못하였다 한다. 정면 가장자리와 대청 북쪽의 툇간을 제외한 나머지 가장자리 칸은 전부 방이다. 북쪽으로 방이 7칸, 남쪽으로 5칸이 있고, 그 중 한 칸은 북쪽 방과 남쪽 방 사이에 있다. 대청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총 4칸이다. 강녕전의 부속 건물로 조선 전기에는 없었고, 고종 때 새로 지었다고 한다. 경성전, 연생전보다 약간 격이 낮은 보조 침전이나 접견소로 알려지다, 《경복궁중건일기》를 통해 왕의 식사를 데워 수라상에 올려 들이던 중간 부엌으로 확인된다. 대칭으로 응지당과 연길당은 거의 같고, 정면 4칸, 측면 3칸, 총 12칸, 동쪽 2칸은 대청, 서쪽 2칸은 온돌방이다. 차이는 강녕전과 복도로 이어지는 문의 위치가 응지당은 동남쪽 측면에, 연길당은 서남쪽 측면에 있는 것이다. 강녕전에서 교태전으로 들어가는 양의문 양 옆에는 강녕전 굴뚝이 있다. 밝은 황토색 전돌로 구성되어, 앞면에 만수무강(萬壽無彊), 천세만세(天世萬歲)라는 한자로 상감처리되어 있다. 경복궁의 강녕전을 왕의 침전,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이라고들 하는데, 이는 세종때에 이르러 건립 되었다고 한다. 교태전은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270여 년방치되다가, 1867년(고종 4) 8월 18일에는 지어져, 다음 해에 왕실이 이어 지고서 교태전이 중궁의 거처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873년(고종 10) 12월 순회당의 화재 시 교태전이 소실 되어, 왕실은 창덕궁으로 이어하고, 1875년 5월에 복구를 시작하는데, 교태전 전후의 건물이 붙어 있고 회랑이 연결되어 화재에 취약하여 구조를 변경하며, 1876년(고종 13) 3월에 지어졌다고 한다. 경복궁 아미산 굴뚝은 교태전 온돌방 밑을 통과한 연기가 나가는 굴뚝으로, 고종 3년(1866) 경복궁을 다시 지을때 만든 것이라 한다. 굴뚝은 4개이며, 6각형의 굴뚝 벽에는 덩굴무늬, 학, 박쥐, 봉황, 소나무, 매화, 국화, 불로초, 바위, 새, 사슴 따위의 무늬는, 십장생, 사군자와 장수, 부귀를 상징하는 무늬, 화마와 악귀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들을 표현한 것이라 본다. 굴뚝의 위 부분은 목조건물의 지붕형태이며, 위에 연기가 빠지는 작은 창이 설치되어 있다. 경복궁 내전을 나온다. 건물 대부분이 소실되어 새로이 지어지고, 이러한 일에 일본이 여러번 관여 되고, 그 들이 우리 역사 속에 남긴 상처들을 둘러보며, 상처를 받아 힘이 빠진다. 자세한 탐방이 아닌 둘러보기로 한 것에 위안을 삼으며, 다른 보물들을 찾아 발길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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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一同行 백 쉰 세번째 - 아산아산을 향해 길은 나선다. 오늘은 이즈음 다시 영화로 재조명 되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보물을 찾아보러 현충사로 길을 잡는다. 당도한 현충사에서 마주한 안내문에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이 2023년 9월 부터 2024년 2월 까지 임시휴관이라 안내판을 접한다. 아쉬움에 다시 방문을 기약하며 문앞에서 돌아 나온다. 이곳 아산에 있는 보물을 찾아 가는 길이다. 원래 이곳은 오랜 폐사지 이었는데 주민이 미륵불이 있어 미륵골이라 불리던 곳에 지금은 용담사가 세워져 있다. 2004년 충청남도 전통사찰로 지정되었 한다. 적으나마 새로이 불사를 이루는 용담사 입구의 오른쪽에 1971년 보물로 지정된 석조 여래상이 자리한다. 통일 신라의 특징을 가지는데, 좌우 대칭으로 규칙적인 옷주름, 짧은 목 움츠린 어깨, 꼿꼿한 자세 등으로 고려시대 초기 작품으로 여긴다고 한다. 이 불상옆의 용담사 사적비에 신라 애장왕때에 원효가 처음 지었고, 고려 광종때 혜명조사가 다시 검립하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한다. 상체가 짧고 하체가 길어 균형보다는 여느 불상보다 훤칠한 느낌으로 얼굴조각이나 옷의 조각이 선명하게 잘 표현되고 보전된 모습이다. 가슴 부분에 약그릇을 감싼 모습에서 증생의 질병을 구하는 약사여래상임을 알게 하여 준다. 양어깨의 옷이 발목까지 내려오며 좌우대칭으로 독특한 문양을 하고 있다. 상반신의 옷 주름은 띄모양 일정 간격을 유지하고, 하반신은 정면에서 3가닥으로 구분되어 U자형을 이루고, 무릎에는 동심원 모양의 옷주름이 새겨져 있다. 무릎에 옷주름은 경 삼화령 미륵삼존불과 영주 석교리 석조여래입상( 보물 제 116호)등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에 간혹나타나는 독특한 수법이라고 한다. 읍내에 자리한 돌기둥 두개는 1971년 보물로 지정된 당간지주이다. 문화재 여행 중에 늘 궁금한 것이 당간지주의 보물 지정 기준이었는데, 오늘도 의문만을 가지고 지주를 살핀다. 높이 410cm, 너비,55cm, 두께39cm 라고 한다.기둥머리가 완만한 곡선 형태를 이루고, 지주 안쪽에는 홈이 있다. 기둥 바깥쪽은 모서리를 깍아 세로로 줄무늬를 새긴 효과를 나타낸다. 지주가 있던 이 위치를 원래 자리로 여기고,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작은 공원 옆의 팔각정에서 바라보며 옛날 절의 모습은 어떠 했는지 상상을 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원래는 집도 없는 곳에 자리했던 지주인데, 이제는 아파트를 배경으로 예전엔 그 곳이 절터 이었음을 주장하는 듯 하다. 이곳서 가까운 곳에 다른 문화재가 있어 찾아본다. 온주아문 및 동헌은 조선시대 온양군에서 관아로 쓰인 건물이라 한다. 이 문은 조선 고종 8년 (1871년)에 다시 세운 것이라 하며, 여러차례 변경되다가 1993년 수리 복원하였다고 한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문위의 누각 건물로, 기단위에 높이 1.5m높이의 주춧돌을 넣고,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워 누마루를 만든 모습이다. 온주의 뜻은 신라문무왕 3년에 온양군을 '온주'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한 듯 하다고 안내되어 있다. 온주아문 안에 자리한 동헌은 지금은 들어가지를 못한다. 매장 문화 발굴작업 중이라 하여, 담 밖에서 안의 모습을 들여다 본다. 앞면 6칸, 옆면2칸의 홑 처마 팔작지붕으로, 길게 다듬은 받침돌을 쌓아 기단을 만들고, 주춧돌을 올려 사각기둥을 세운 이건물은 조선시대에 동헌으로 쓰이고, 일제하에서는 주재소로 사용되다가, 해방 후는 파출소, 그리고 온양시 온주동 사무소로 사용 되었다고 한다. 온주아문옆에 모아 놓은 옛 온양군 관리와 관찰사의 송덕비들이라 한다. 과거 온양군 관리들의 선정과 당시 시대상을 읽을 수 있는 곳이다. 현충사에서 충무공에 관한 보물을 보러 방문하였으나, 뜻하지 않게 아산의 여러 보물들을 둘러 보게 된다. 이 외에도 여러 곳을 더 들려 볼 예정이었으나, 다음 현충사를 찾을때 방문하기로 한다. 다음의 여정은 현충사를 기점으로, 내친 김에 몇몇 여행지를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충무공의 흔적을 중심으로 찾아 보는 것으로 정하고, 흥분되어 집으로 차를 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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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一同行 백 쉰 두번째 - 영동영동의 영국사로 향한다. 몇번의 방문의 기회는 있었지만 모든 문화재를 다보지 못하여 이를 이루기 위함이다. 이곳의 망국봉의 석탑을 보지 못 한 것이 늘 마음에 걸리는데, 그동안 산 위의 탑을 보러가기 충분한 여건이 아니어서 오늘은 그 곳을 찾아 보려고 나서는 길이다. 영동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발견한 안내 표지판을 따라 옥천 두암리의 삼층석탑을 찾아본다. 두암리 절터는 고려 전기의 석탑으로 추정된다고 하며, 기단이 이중으로 되어 있고, 상륜부는 노반과 보개석만이 남은 형태이다. 몸돌과 지붕돌이 한돌로 되어 있다. 이제는 마을로 변한 절터에 홀로 자리하는 탑이 주민들의 관심 속에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바삐 영국사를 찾아 길을 나선다. 겨울이라 조용한 영국사 이다. 유명한 은행나무가 옷을 벗어선지 방문객은 드물다. 영국사는 통일신라시대말의 사찰로, 고려 시대 대각국사 의천이 천주산 국청사라는 이름으로 고쳐 짓고, 원각국사 덕소가 머물며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한다. 지륵사로도 불리고 1879년 산사태로 사찰 부지가 묻히는데, 1934년 주봉조사가 대웅전을 짓고 삼층석탑을 현위치에 복원하였다고 한다. 안내문에 전통사찰 2호라 적혀 있어 1호가 무언지 궁금증이 생긴 사찰 앞에 주차하고 사찰 오르기 전에 앞에 자리한 은행나무에 정신을 뺏긴다. 겨울의 잎 떨어진 모습이 천태산의 바위 암릉과 멋진 모습을 만들어 낸다. 높이 31m, 가슴둘레 11m에 나이1000살로 국가에 어려움이 있을때 소리를 내어 운다고 하며 가을의 단풍든 모습이 멋진 나무이다. 사찰로 들어서면 대웅전 앞에 석탑이 자리한다. 신라시대의 탑으로 2중 기단에 3층을 올린 모양이다. 원래 옛절 터 위에 넘어져 있던 것을 이곳 대웅전 앞마당에 옮겨 놓은 것이라 한다. 신라후기 건립 된 화강암 탑으로 복원시 2중 기단의 위층과 아래층이 바뀐 것을 2003년 문화재 보수 정비 작업때 바로잡은 것이라 설명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맞배집 그리고 공포는 내외삼출목으로 쇠서 위에 연화문을 조각한 조선 후기의 수법이라한다. 사찰을 둘러보고 보물을 향해 발을 옮긴다.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보물을 찾아 본다. 이 비석은 고려 의종 7년 선사에, 명종 1년 왕사가 된 원각국사의 비로, 조선금석총람에 명존 10년 한문준이 비문을 짓고 원각국사 비를 건림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비의 몸돌은 점판암으로 내용을 알 수 없는 총알을 맞은 흔적이 있다고 한다. 바닥에 보관 중인 비머리 부분은 4마리의 용이 있는 특이한 형태이다. 이 비의 뒤편에 자리한 두개의 승탑이 자리한다. 승탑의 주인을 알 수 없다고 한다. 높이 184cm로 연꽃무늬가 위 아래로 한 잎으로 세겨진 것으로 고려 말에서 조선초기로 추정한다고 한다. 구형에 팔각지붕을 얹은 구조에 보주를 가지고 있다. 이 승탑도 주인공을 알 수 없다 하며, 양식은 석종형이라 한다. 여러 장식 문양이 조각되으며, 연꽃의 문양이 고려말 조선초 작품 유형이라 한다. 이곳에서 산을 조금만 오르면 보물의 승탑이 자리하고 있다. 앞선 두가지의 승탑이 원각국사의 탑이 아니라면 그 분의 탑이라 생각해 본다. 산길을 오르며 왜 승탑은 사찰에서 조금 높은 위치에 자리하는 지 궁금해진다. 남쪽의 언덕에 자리한 승탑으로 관심이 없으면 아래 승탑만 보고 미처 보지 못 할 위치이다. 신라와 고려에서 많이 조성 된 8각 원당형의 승탑을 화강암으로 만들어 졌다고 한다. 하여 이때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데, 원각국사의 유골이 영국사에 모셔졌다는 기록이 비문에 있어, 이 부도가 원각국사 사리를 모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아래에서 본 두 승탑은 원각국사를 추종하던 다른 스님들 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이제 늘 보지 못하고 돌아 간 탑을 보기 위해 산행을 해본다. 망탑으로 가는 길은 내리막에서 만난 삼단폭포를 지나 다시 오르는 쉬운 길은 아니나 그리 길지 않은 길이라하여 언 덕을 힘들게 올라본다. 산위에서 상어를 만난다. 높이가 8m, 폭이 6m라고 하는데 봉우리를 오르다 갑자기 나타난 모습에 놀라게 된다. 바위에 만들어 놓은 이빨로 인하여 섬뜻한 감을 주는 이 바위는 사람이 혼자 흔들어도 흔들린다고 하는데 흔들다 떨어질까 그만 둔다. 상어바위를 지나 눈앞에 망탑봉으로 불리는 작은 봉우리에 오르니 화강암반 위에 자연 암반을 그대로 이용 하여 기단으로 삼고, 탑 몸돌을 위에 세운 모습의 탑이 보인다. 몸돌과 지붕돌은 다른 돌로 만들어져 있고, 고려 중기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탑의 높이는 2.43m로 낭떠러지 같은 산봉우리 끝인 이곳에서는 천태산 주차장이 내려다 보이기도 한다. 오늘 망탑을 보게 된 것에 많은 만족감을 느낀다. 이 곳에 자리한 석탑이 주는 이미지도 강렬하고 멋지지만, 이 곳까지 방문하는 동안의 과정도 만족스럽기 때문이다. 이제 보다 높은 곳 까지 보다 올라 문화재의 탐방을 위한 움직임이 가능하단 것이 흐믓하다. 땀이 나도록 걸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쉬울 거리이지만 그래도 이루어 낸 것에 대한 희열을 맛 본다. 사찰로 돌아 와 차를 몰며 은근 뿌듯함으로 귀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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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一同行 백 쉰 한번째 - 보성남쪽의 보성을 찾아본다. 벌교에 자리한 보물 304호 보성 벌교 홍교를 찾아보고 주변의 문화재를 보기 위한 길이다. 벌교는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나오는 지명이 많아서 였을까. 마치 소설의 등장 장소를 찾아보는 느낌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홍교는 다리밑이 무지개 같이 반원형으로 쌓은 다리를 말하는데, 아치교, 홍예교, 무지개 다리라고도 한다. 이곳에 소설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글귀가 홍교앞에 있어 옮겨본다. " 김범우는 홍교를 건너다가 중간쯤에서 멈춰섰다. ..... 그러니까 낙안벌을 보듬듯이 하고 있는 징관산이나 금산은 태백산맥이란 거대한 나무의 맨끝 가지에 붙어 있는 하나씩의 잎사귀이 셈이었다. (태백산맥 1권 257쪽)" 이어지는 다리는 현대의 다리로 이 것을 본 떠서 이어 붙여 실제 다리는 길다. 이 다리를 놓을 때는 강의 하상이 이리 넓지 않았나 보다. 벌교( 筏橋)는 뗏목으로 이어 놓은 다리를 말하는 데, 이전의 뗏목다리라는 벌교가 지명으로 사용되었나 보다. 남아 있는 홍교 중 가장 크며 아직 이용되고 있다. 다리 저쪽으로는 새로이 이어 붙인 다리가 있다. 규모는 폭이 4m, 길이 80m정도이며, 이 다리를 위해 60년 마다 회갑잔치를 해주고 있다고 한다. 원래는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 땟목다리가 있었는데, 조선 영조 10년 순천 선암사 승려가 돌다리로 만들어 놓았다고 하며, 그 후 영조 13년 다리를 고치면서 3칸의 무지개다리로 만들고, 1981년~1984년 까지 4년에 걸친 보수 공사로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다리밑 마다 한 가운데 용머리가 돌출되어 아래로 향해 있는데, 이는 물과 용의 관계에서 오는 민간신앙의 표현으로 보이며, 예전에는 이 용의 코 끝에 풍경을 달았다고 한다. 홍교를 보기 위해 그냥 지나친 벌교 읍내로 들어선다. 벌교읍을 둘러본다. 이곳에는 벌교 조정래 태백산맥 문학관이 있으며, 곳곳에 소설에 등장하는 건물도 볼 수가 있다. 조용히 읍내 길을 둘러본다. 소설을 읽어 보지 못한 내게 동행인이 오래전 읽은 아련한 기억으로 이야기를 건네 준다. 사연을 담은 술도가 등 구경에 재미를 느낀다. 이 가옥은 소설<태백산맥>에서 남도여관으로 등장한 2011년 복원공사된 일식 주택 형식의 여관 건물이다. '구 보성여관' 은 드물게 남아 있는 한옥과 일식이 혼합 된 일본식 여관으로 건축물로써 만이 아니라 벌교의 근현대 역사문화환경을 형성하는 건물로 가치가 높다고 한다. 검은 판자벽에 함석 지붕의 일본식으로 지어진 2층 건물은 등록문화재 제132호 이다. 대하소설 태백산맥과 동명의 영화에서 반란군 토벌대장 임만수와 대원들이 머무는 '남도여관'의 실제모델 이라 한다. 또 다른 보성의 보물인 마애불을 찾아 길을 나선다. 일월사의 주차장에 차를 대면 멀리 마야불을 위한 전각이 보인다. 안에 매애불이 자리한다. 전라남도 보성군 율어면의 존제산 북쪽 기슭 고려시대 존제사가 있었던 곳에, 세로 5m, 가로 4.3m 정도의 큰바위에 새겨진 불상으로 양련이 새겨진 대좌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는 마애불이다. 민머리에 육계가 있고, 둥글고 원만한 얼굴을 하고 있으나 코와 입부분이 파손되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양팔에 걸쳐 무릎을 덮고, 어깨 부분이 별도의 쇼올을 걸친 것 같이 표현되어 있다. 두 손은 가슴에서 모아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있는 흔하지 않은 설법인을 하고 있다. 머리광배와 몸광배가 2줄의 선으로 분리되어 있고, 선 안은 구슬 모양이 조각되고, 바깥부분에는 불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데, 마침 옆에 이전의 사진이 있어 비교하며 보게 된다. 남아있는 모습이 사진과 같지 않음을 안타깝게 생각된다. 주변에는 많은 큰 바위들이 있으며 또한 주변에 12간지 동물을 닮은 바위들이 있어 그 이름을 붙여 놓아 둘러보는 재미가 더 한다. 아래에도 바위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다. 이 곳에서 다른 유물은 발견되지 않고 기와 조각 만이 흩어져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존제산 일월사라는 사찰이 들어서 있다. 일월사는 1800년대 말경 낙안의 징광사와 함께 폐사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뚜렷한 이유는 따로 전해지지는 않고 있다고 하며, 1970년 말부터 진행 된 복원 불사를 통해 그 모습이 바뀌고 있다고 한다. 하늘 아래 해와 달이 동시에 떠 있는 신비한 광경을 본 도선국사와의 일화가 있는 사찰이라 한다. 새로이 번창하는 사찰을 둘러보고 또 다른 보물을 찾아 길을 나선다. 1988년 보물로 지정된 이 탑은 벌교와 보성간의 국도 변인 우천리 마을 앞 논 한가운데에 세워져 있는 탑이다. 이 곳은 절터로 추정되나 문헌에 남아 있는 기록이 없고,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징광사에 딸린 부속 절이 있던 곳이라 하기도 한다. 탑은 기단의 일부분이 땅 속에 묻혀 있고, 바닥은 시멘트로 발라져 밑부분의 정확한 모습을 알 수 없다고 한다. 기단부에는 기둥을 본뜬 조각이 있고, 탑신은 3층으로,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몸돌에도 모서리에 얇게 기둥 모양을 새겨놓았다. 지붕돌의 밑면의 받침은 4단씩이고, 처마 밑은 수평이고,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머리장식은 노반과 복발이 있다. 1970년에 해체하여 복원한 것으로 각 층 몸돌과 지붕돌의 비례가 잘 맞는 것으로 보아 통일 신라 시대인 9세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짐작된다고 한다. 마을에 덩그라니 남아 있는 탑을 보며 세월과 시간의 흐름 속에 남는 것과 없어지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듯한 느낌이다. 오랫동안 유지 된 석조물로 만든 유형문화재인 보물보다, 태백산맥의 소설 속의 유형문화재가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것을 보며, 모든 것의 유무로 존재하게 되는 것은 사람들의 뜻에 달렸다는 생각이 든다. 먼길의 이곳 저곳의 문화유산을 보느라 바쁘게 보내며 새로운 곳을 보게된 기쁨을 느끼며 다시금 집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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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一同行 백 쉰번째 - 청송청송으로 들어선다. 년말을 대부도에서 해넘이을 친구 들과 보낸 것이 기억나, 새해 첫 주 여행은 해돋이를 위한 동해 방문을 위해 고속도로를 달리는 중, 낯이라는 생각으로 청송에서 내려서다 덕천 마을로 들어서게 된다. 600여년 역사의 흔적과 정취가 살아있는 충효마을로 청송 심씨 본행이자 집성촌이며, 배산임수형의 연꽃마을 인 탁천마을 엔 99칸 심부자댁인 송소고택, 찰방공 종택, 송정고택 등이 있는 고택이 잘 정돈 된, 국제 스로 시티 청송에 어울리는 명품고택과 한옥스테이를 운영하는 국제슬로시티 마을로 선정된 곳으로, 마을내 자전거 타기와 둘레길 산책 원두막 및 천영염색 등 많은 체험거리를 즐길수 있는 곳이라 한다. 고려국 전리판서 악은 심선생신도비라는 비와 경의재가 마을 초입에 자리하나 경의재의 문이 닿혀 있어, 대문 앞 전경만 보고 물러난다. 경의재는 악은 심원부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청송심씨의 재실이라 한다. 고려말 3은으로 알고 있는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이 외에도 경북 성주 도은 이숭인, 경남 고성의 장산마을의 호은 허기, 농은 민완부 처럼 고려말에 충절로 낙향하여 호에 隱자를 사용한 분들 중에 한 분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소형차만 진입 가능한 마을 안길을 따라 마을회관 앞에 차를 세우고, 마을 안 길의 왼쪽으로 송소고택을 향해 걷다 보면, 이 곳의 큰 집 격인 송소 고택과 담장 하나 사이에 두고 있는 청송심씨 찰방공 종택을 먼저 만나게 된다. 청송 심씨 악은공의 9세손인 찰방공 심당(1604~1674)의 종택으로 계류년 (1933년)에 건립되였다 하고, 구조는 안채, 좌익사, 사랑채, 재문채로 연결된 ㄷ자형을 이루고, 경내 별채에는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이 있다. 이 곳은 지금 전통한옥에서의 숙박 체험의 장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농촌마을의 전통 체험인 다도예절 체험과 감자캐기 체험을 통해 고택에서의 즐거운 추억 만들기를 제공하고 있다. 이곳의 멋은 장독대와 뒤편의 화단으로 눈길을 끈다고 한다. 찰방공고택을 들어 선 골목을 돌아 나와 송소고택으로 가는 길에는 리빙카페가 한옥으로 잘 꾸며져 있는 것을 보게 되고, 이내 송소고택의 너른앞마당에 당도 하게 된다. 조선 영조때 만석의 부를 누린 심처대의 7대손 송소 심호택이 1880년 이곳 덕천리로 이주 하면서 건축한 가옥이라 한다. 송소세장이란 현판을 달고 9대간 만석부를 지낸 건물로, 경북 북부양식이라 한다. 건물에 독립 된 마당이 있으며 사랑공간, 생활공간, 작업공간으로 공간이 구분되어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99칸의 고택답게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큰규모의 건물로, 앞마당에 정원을 가지며 우측에 작은 사랑채가 있다. 안채는 ㅁ자형으로 대청마루와 세살문과 빗살무늬 교창이 보인다. 안채의 너른 마당과 양옆의 곳간이 인상적이다. 한옥의 많은 모습을 눈에 담고, 옆에 자리한 송정 고택으로 자리를 옮기다 대문채 앞에서 겨울용 장작을 하는 주인장을 마주하며 생활하며 잘 가꾸고 생활에 이용하는 모습이 여간 좋아보이지 않는다. 문화유산은 사람의 손이 많이 가야 보존이 잘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문화재청에서 문화재라는 명칭 대신 문화유산으로 사용하기로 정하니 나부터 그리해 보려 한다. 1914년에 지어진 송정 심상광의 살림집으로, 심상광은 조선 후기 만석꾼인 송소 심호택의 차남으로, 안동도산서원장, 안동병산서원장, 청송향교 전교등을 지낸 분이다. 송정고택과 연접해 있으며 안채, 사랑채, 별채로 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ㅁ자형이다. 옆면으로 보면 ㅁ자형 구조가 보인다 . 이건물은 입구에 대문채를 가지고 있으며 송소 고택과 담 하나로 인접하여 있다. 오른 쪽으로 더 들어가면 세덕사를 만난다. 송소가 덕천마을로 옮겨와 99칸의 송소고택을 짓고, 아들 들을 위해 40칸의 집을 세 채 더 짓는 가운데, 넷째 아들이 태어나 한 채를 더 지으니 모두 네 채가 되는데, 그 중 한 채라고 한다. 경복궁을 중건했던 도편수 2명이 집을 지었고, 30여 명이나 되는 인부들이 인근에서 기거하며 집을 지었다고 전한다. 이곳 세덕사를 포함해 두 채는 어떤 사연으로 불에 타버리고 지금은 송소고택과 송정고택만 남아 있으며, 현재에는 당시 건물 일부만 남아 있다. 길을 돌아나와 마을회관 오른쪽 길로 향한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고택 두채가 보인다. 청송심씨 석촌공파 17세인 심덕활 공이 요절한 아우 덕종의 양자로 입적한 친아들 헌문의 네번째 돌을 기념하여 순조 6년 에 건축하였다고 전하며, 21세인 의해가 1900년에 보수하여 거처하여 오늘에 전한다고 한다. 이 건물은 1917년 지어진 심시택의 살림집으로, 심시택은 청송 심부자로 알려진 송소 심호택의 친동생으로 송소고택에서 분가하여 건립하였다고 한다. 검눌 형태는 일자형 안채와 행랑이 연결된 ㄴ자형 사랑채, 부속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ㅁ자형 구조를 가진다. 방문시 조우한 주인으로 부터 이곳의 숙박에 관한 정보를 듣고, 내부에서의 취사금지와 화장실의 외부 사용 등의 정보를 얻는다. 주인은 타성으로 귀촌한 분인데, 원하던 생활을 지내 행복해 보인다. 소상히 내부를 구경시켜 주시고 안내 하여 주고, 또한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절경도 귀뜸하여 준다. 오늘 방문한 가옥들이 한옥스테이지로 이용될 수 있다고 한다. 숨은 비경인 청송호 상하부 댐을 둘러보고 이내 백석탄을 길을 나선다. 계곡에 자리한 백석탄은 백년설로 뒤덮인 히말라야를 닮은 모습이라 소개하는데, 눈부시도록 하얀 빛을 내며 서있는 바위들이 나의 눈에는 빙산처럼 느껴진다. 강원도 영월의 요선정 아래의 바위에서 본 돌개구멍에서 느낀 신비함에 하얀 색상의 황홀감이 더해진 느낌이다. 계곡 따라 멋짐을 즐기다 차로 돌아온다. 추위와 오랜 발걸음이었지만 눈이 느낀 즐거움으로 대신 해본다. 백석탄의 밝은 색은 석영 장석등 밝은 광물이 모여서 된 암석 때문이라 한다. 이곳 청송은 세계 유네스코 지질 공원이 있는 곳이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 만안 자암단애를 보게된다. 철성분이 많아 붉은 절벽이란 자암단애라 부른다. 안동의 길안으로 가는 길에서 하천 계곡을 따라 바위와 물이 만들어 내는 많은 절경을 보며, 새해 동해에 미치지 못 하였으나 새로움을 알게 되는 기쁨 충만한 기분으로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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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一同行 백 마흔 아홉번째 - 안동안동으로 향한다. 세월이 흘러 어머니 첫 기일이 되어 묘소를 찾아 보는 길이다. 많은 것 들이 떠오르지만, 그 간 잊고 지낸 것을 되새기며, 사람은 그저 곁을 내주다 서서이 지워지는 것인가 생각해 본다. 마침 하회 별신굿 탈놀이장을 지나며 열린 문으로 들어서서 놀이에 함께 자리해 본다. 거의 끝날 무렵의 입장 이어서 인지 함께 흥이 나기 이전에 끝이 나서 아쉽다. 이 전 에 경남 고성의 오광대놀이 보존을 위해 노력과 헌신으로 애 쓰시는 분들과 인연이 닿아, 수고로움과 어려움을 본 일이 있었는데, 이곳도 전통의 문화재 보전을 위해 애쓰시는 모습에 다음에는 처음 부터 자리하여 관람해 보기로 한다. [무형 문화재 하회별신굿 탈놀이] 하회마을을 나와 풍산읍으로 이동하며 소산마을을 찾아본다. 이전에 인근의 가일마을을 방문하여 글을 남긴 일이 있는데, 이곳도 보물이 존재하는 마을이라 자연스러이 찾아 본다. 이곳 마을 입구에 먼발치 정자가 보인다. [삼구정] 마을 로 들어서면 앞 언덕 위에 삼구정이 있다. 연산군때 김영수가 88세의 노모를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지은 정자로, 삼구정은 거북이 모양의 돌 3개가 담장 안 마당에 있어 삼구정이라 한다하니, 나오며 들려볼 맘으로 마을로 들어선다. 마을 초입에 자리 한 보물 청원정이 보인다. [보물 제 2050호 청원루] 안동 청원루(安東 淸遠樓)는 풍산읍 소산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로, 비교적 최근인 19년 12월에 여러 누정과 함께 보물 제2050호로 지정된다. 조선 중종 때 김번 선생이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은 집으로, 100여 년이 지난 1646년(인조 23년)에 청음 김상헌 선생이 누각으로 다시 지었다고 한다. 김상헌은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저 하랴마는,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 말동 하여라" 라는 시를 남긴 분으로, 병자호란때 인조의 굴욕적 굴복을 반대한 척화주전론의 우두머리로서, 청군의 지원병 요청을 반대하는 상소로 청나라에서 6년 동안 옥살이를 하고, 풀려난 뒤 이 누각을 지었는데, 이름도 청나라를 멀리한다는 뜻으로 '청원루'라 했다고 한다. 청원루의 평면구성은 좌우대칭으로, 좌우 전면으로 누마루를 달아내고, 칸살을 달리하여 누마루를 강조한 모양으로, 이것은 제사와 살림보다는 조선 초기 접객 중심의 가옥 구성형식을 반영한 것으로 본다. 경상도 지역에서 'ㄷ'자 평면의 별서건물도 드물지만 정자로서도 매우 희귀하다고 한다. 인방, 벽선 등 수장폭으로 결정되는 부재들이 예외적으로 굵고 넓고, 부재들에 장식이 거의 없으며 곡선보다는 직선을 강조한 건축물이다. 지붕은 보통 건물보다 지붕선이 직선적이다. 원래 41칸의 2채의 건물이 1934년 한채가 홍수로 허물어져 현재 앞면 7칸짜리의 건물만 남아 있다고 한다. 청원정을 나와 언덕을 조금 오르며 동내 탐방을 시작해 본다. 마을에 들어서 이정표에 보이는 청원루(보물)와 삼구정, 양소당, 삼소재, 묵재고택, 동야고택, 비안공구택 등 7점의 문화재가 있다하여 주섬주섬 눈에 담아 보려한다. [안동 소산동 동야고택] 언덕을 오르니 처음 맞이하는 동야 주택에 당도한다. [동야고택] 김중안이 1700년 전후에 지은 것으로 동야 김양근이 태어난 곳이라 한다. 김양근이 과거급제 후 영조에게 답안으로 '공자가어'에 나오는 '노인동야 필사'를 응용하여 제시하니 영조가 '동아 선달은 어디있느냐'고 부르며, 시권을 외우게 한 것을 기념하여 "동야"라 호를 정하였다고 한다. [동야고택과 위에 자리한 안동김씨종택] 두 고택이 이루어 낸 모습에서 빨리 위의 고택을 알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안동김씨종택] 조선 성종때 양소당 김영수가 지었다고 한다. 김영수는 안동김씨 소산 입향조인 비안공의 손자이다. [안동김씨 조액 사랑채] 사랑채는 두칸의 사랑방과 2칸의 대청이 나란히 있고 뒤편에 1/4칸 규모의 수납공간과 2칸 규모의 부속방이 있다고 한다. 현판의 양소당은 '근본을 기른다'는 뜻의 당호로, 현액의 글씨는 김학순이 안동부사를 지내며 썼다 한다. [안동 김씨 종택 옆모습] 검눌의 구성은 사랑채, 증간문체, 안채로 구성된, ㅁ자형으로 오른쪽에 사당이 있다. 겹집으로 구성된 안채는 2칸의 안방과 대청이 있고 안방 앞에는 툇마루가 있고, 그 위에 벽장이 있으며, 대청옆에는 다락이 있다고 한다. 인근한 묵재고택을 방문한다. 이고택의 출입문은 기와가 아닌 초가로 엮여있다. [묵재고택] 초가지붕의 이곳은 대문이 달린 행랑채로 지붕을 새로 엮는 공사중이다. [묵재고택 내부] 이집은 H자형 본체와 일자형 행랑채가 큰 ㅁ자형으로, 본체는 안방과 대청을 중심으로 , 왼쪽에 부엌과 온돌방이 있고, 오른쪽 날개채에는 곡식이나물품을 보관하는 도장방과 사랑방이 있다. [묵재고택] 안동김씨가 대대로 살아온 집으로 언제 지어졌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이 곳 소산마을은 조선시대 문신 김삼근이 처음 자리 합은 후 안동김씨 후손등이 모여 살게 된 곳으로, 묵재고택이라는 이름은 김삼근의 둘째 아들 김계행의 양아들인 김종윤의 호를 딴 것이라 한다. [안동 비안공 구택] 조금 더 위로 오르면 조선 세종때 비안 현감을 지낸 적이있는 비안공 김삼근의 옛집으로, 풍산현 남불정촌에서 살다가 둘째 아들 김계형이 태어난 이 후 이 곳 소산리로 옮겨 올 무렵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김삼근의 맏손자인 김학조와 들째 손자인 김영전이 태어난 곳으로, 학조는 세조때의 고승으로 김영전은 사헌부감찰, 합천부사를 지냈다고 한다. [안동 비안공 구택] 정면 5칸 옆면 4칸의 ㅁ자형 집으로 자연석으로 높게 단을 만들고 그위막돌로 주춧돌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다. 돈소당이라는 현판은 가찰공 김연전의 9대손 언행의 호를 따서 달은 것이라 한다. [삼소재] 언덕을 내려서며 남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삼소재가 자리하고 있다. 선안동 일명 살락김씨중시조인 김장경의 17대손 김용추의 종택으로, 용추의 5대손인 통정대부를 지낸 삼소재 김종락의 호 '삼소'를 딴 것이라 한다. [삼소재] 비스듬한 경사위에 자리한 정면 6칸, 옆면 다섯칸으로 동쪽을 향하고 있고, 안채와 사랑채를 중간문으로 연결된다. 사람이 기거하며, 뭔가 수리를 위한 작업이 이루어져 마당 끝에서 구경하는데, 사랑채 마루에 서랍이 많은 장이 눈길을 잡는다. 멀지 않은 곳에 여러 고택이 함께 자리하여 걸으며 관람하기 좋은 마을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전 하회를 방문하면 일가친척 중에 소산 할배가 허연 머리와 수염을 기르시고 흰 한복 차림으로 반가이 맞아 주셨는데, 아마도 할머니가 이곳 소산마을 분이라 택호를 따서 소산할배라 볼리신 것이다. 소산마을의 보물인 청원루를 통해 그 내력과 안동김씨의 집성촌이라는 것을 잘 알게 된 하루이다. 지금도 계속 생할의 삶이 이어지고 있는 소산마을을 돌러보며, 불편란 점이 많아도 잘 보전하면서 생활하는 분들의 노고가 느껴진다. 이북서 월남하신 부모를 둔 나의 동행자의 고향은 통일이 되어야 함께 할 수 있구나 하는 안타까움으로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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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一同行 백 마흔 여덟번째 - 이천경기 이천을 여행한다. 이천에서는 오래 전 영월암의 마애여래입상을 찾았었는데, 이번에는 장암리에 있는 마애보살 반가상을 찾아 본다. 보물 제 982호 였던 이 마애불은 산속의 언덕이 아닌 마을 길 옆 큰바위에 자리하고 있다. [ 보물 제 982호 장암리 마애보살반가상] 미륵바위라는 화강암 바위가 길옆에 덩그라니 놓여있고, 앞면에 부조로 표현된 보살좌상으로 고려 경종6년(981년)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머리에 쓴 보관에는 화불이 있고, 손에는 연꽃 가지를 든 관음보살상으로, 얼굴은 사각형에 가깝고, 넓은 이마와 큰 눈을 가지고, 얼굴이 조화 된 미는 없는 듯 하다. 오른 발은 내리고 왼발을 오른쪽 무릎 위에 걸친 반가 자세를 취하고, 옷의 표현이 희미하다. 바위 뒷면에 "태평흥국 6년 신사 2월 13일..."이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어 조성 연대를 알 수 있는 마애불 이다. 바위 뒤를 확인하나 나의 눈에는 정확한 글을 알 수가 없지만, 반가상의 마애불의 특이함과 연대를 알 수 있다고 하니 보물로 지정은 당연할 것이라 생각해본다. 이 보살상은 경기도 하남시 교산동의 태평 2년명 마애약사불 좌상(보물 제 981호)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 졌지만, 그에 비해 표현이 둔중하고 도식적이라 한다. 안내문에는 오히려 경북 김천시 광덕동 석조보살 입상( 보물 제 679호)이나 경북 고령군 개포동 마애여래 보살상과 유사하게 상퉁하는 지방양식을 여긴다고 한다. 하남과 김천의 보물로 지정 된 두 불상은 본 기억이 있어 이해가 가나, 고령군의 불상은 새로이 방문지로 기억하고자 기록을 남긴다. 머지 않은 곳에 자리한 불상을 찾아 나선다. 문화재 자료로 보전되는 이평리 석불 입상이다 . 덩그라니 화강암으로 조성된 입상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어찌된 영문이지 모르겠으나 아래부분이 보이지를 않는다. 곱슬머리에 상투모양의 육계를 가진 듯하고, 얼굴이 마멸되어 눈 코 입 등을 잘 알아볼 수가 없다. 전체적으로 마모가 심하나 고려시대 불상양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옷은 통견으로 U자형 무늬가 보이며 목이짧지만 삼도가 표현 되었을 것으로 본다. 예전에는 멋진 모습으로 서 있었을 법한 불상이, 연고를 알 수 없으나, 이렇듯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보니 갑갑한 마음을 갖게 된다. 갑갑한 마음을 풀어보러 도립리의 천연기념물인 반룡송을 찾아본다. [이천 도립리 반룡송] 이천 백사면 면사무소에서 멀지 않은 도립리 어산마을에 자리한 이 소나무는 하늘에 오르기 전에 땅에 서리고 있는 용이라 하여 반룡송이라 부른다고 한다. 또한 일만년 이상 살아 갈 송이라 하여 만년송이라고도 불린다, 수령은 약 900년 으로 추정 하고 높이 4.25m, 가슴높이 둘레 1.83m라고 한다. 높이 2m 정도에서 사방으로 갈라져 넓게 퍼지고, 하늘로 향하는 가지는 용트림을 하듯 꼬여 있다. 신라 말 도선스님이 이곳과 함흥, 서울, 강원도, 계룡산에 서 장차 큰 인물이 태어날 것을 예언하면서 심어 놓은 소나무의 한그루라고 전해지며, 이 나무 껍질을 벗긴 사람이 병을 얻어 죽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사람의 내왕이 많고 산업화 되어 가는 이천에서, 문화재와 천연기념물의 보전에 관해 노력하여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음을 본다. 이천을 여행 중 이진상회라는 곳에서 잠시 쉬어도 보았다. 다양한 볼거리와 맛집이 자리하고 있어 방문객이 많은 핫한 장소라 생각되었고, 여행 중에 들러 잠시간이라도 현대인인 척 해보며, 이곳을 즐기는 사람들 속에 끼어 이 곳을 둘러 본 것에서 작은 행복을 맛 보았다. 이제 돌아가 여행의 지침과 행복감에 잠을 청하고자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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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一同行 백 마흔 일곱번째 - 당진오늘은 당진으로 향한다. 당진에 자리한 영탑사 사찰을 찾아 보물을 만나보려 한다. 뒤로는 상왕산을 등지고 자리한 이곳에는 그 모습이 화려한 금동비로자나불 삼존불상이 있는 곳이다. 사찰은 수덕사의 말사로 통일신라말 도선 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는 사찰로, 고려 중기에 보조국사가 5층 석탑을 세우며 영탑사라 하였다고 하는데, 이후 무학대사가 천연암석에 불상을 조성하고 사찰을 중건하며, 5층석탑을 유리광전 뒤의 바위 위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산으로의 오름없이 평지에 자리잡은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사찰로 오르는 길에는 아름드리 노거수가 자리하고 있다. 일주문이 없는 사찰의 지붕을 보며 자리를 옯기면 사찰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커다란 마당이 자리한다. [영탑사 대웅전] 경내의 정면에는 최근 조성 된 대웅전이 자리하고 [유리광전과 칠층석탑] 오른쪽에는 유리광전과 7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 내부에 자리하던 범종은 수덕사 근역 성보관 특별전으로 외출 가서 못보게 된다. [영탑사 범종] 영탑사 범종은 1760년(영조 36년)에 제작으로, 높이 60cm밑지름 46cm인 작은 종으로, 용뉴는 용이 네발을 펼쳐 종을 잡고 있는 형상으로, 몸통에 종을 메달게 되어 있고, 음통이 없고 조그만 구멍이 뚫여 있다. 몸의 유곽과 유곽 사이에 보살상이 있으며, 종의 표식엔 가야사 법당 금종을 백근의 쇠를 녹여 만든 내용과 적산 홍주 면천지역에서 시주한 신도 들의 이름도 적혀있다고 한다. 이는 이 종이 가야사를 위해 만든것 임을 알 수 있는데, 가야사는 흥선대원군이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쓰기 위해 불 태워진 절이라고 하며, 가야사 스님들에 의헤 옯겨졌다고 전한다. [인법당] 보물인 삼존불이 자리한 건물로 전각의 가운데 모셔져 있다. 대웅전이 아닌 이곳에 차려진 법당의 유리함 안에 잘 모셔진 삼존불상의 모습이다. [보물 제 409호 당진 영탑사 금동비로자나불 삼존좌상] 8각형 연꽃무늬 대좌 위로 본존불인 비로자나 부처님과 협시보살로 문수 보현 보살이 자리한 삼존좌상으로, 본존불 비로자나 부처님은 네모진 두상에 가늘고 내려뜬 눈 오똑한 코와 적은 입의 형상 기법이 고려불상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한다. 좌우 협시 보살은 모습과 손동작이 대칭으로 같으며, 화려한 모습이다. 좌대는 연곷 모양으로, 좌대에서 나온 연꽃줄기가 두 협시보살이 좌대로 활용된 특이한 형상을 보인다. [유리광전] 돌 축대를 쌓아 올려 지어진 유리광전으로 향한다. 안에는 천연 바위에 여래상이 모셔져 있다. [영탑사 약사 여래상] 법당 안에 자리한 큰 바위에 모셔진 불상에 조명이 비추어 신비감을 주고 있으며, 독특한 형상의 자연 바위에 듬직한 부처상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을 느끼게 된다. [영탑사 약사 여래상] 고려시대 만들어 진 것으로 알려진, 동쪽 정유리세계에 살면서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고 재앙을 없애며, 현세의 행복함과 즐거움을 이루게 하는 부처인 약사 여래상이다. 불상은 높이 3.5m 의 좌불로, 하반신은 잘 보이지 않고 얼굴 부분은 뚜렷하다. 세련미는 없으며, 친근감이 드는 고려시대 지방화 된 불상양식으로 보인다. 고려말 무학대사가 사찰을 둘러보니 기이한 바위가 빛을 내고 있어, 이곳에 약사여래상을 새겨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빌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영탑사 약사여래상] 영엄한 부처님을 모셔서 인지 질병의 쾌유를 비는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 불상을 모신 바위가 연이어 산위로 뻣어난 바위 위에는 칠층 석탑이 모셔져 있다. 유리광전의 바위와는 떨어져 있는 듯 보이고, 벽으로 분리되어 있으나, 암반은 같은 것이 아닌가 싶은 모습이다. [영탑사 칠층석탑] 바위를 기단 삼아 암반위에 자리한 칠층석탑은 5층만 남아있던 것을 1911년 7층으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7층으로 제작하여서 인지 넓지 않고 긴형태이나 바위와의 조화가 어울리며, 낙수면이 직선적이고, 처마는 약간의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몸돌과 지붕돌이 하나로 되어 있다. 이 곳에 탑이 세워지게 된 내용은 두가지로 전해진다고 하는데, 하나는 1789년 지윤 스님이 유리광전을 보수할 때 5층탑을 세웠고, 탑을 기리기 위해 영탑사라 이름 지었다는 것과 대원군이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쓰기 위해 덕산 가야사를 불 태웠는데, 이때 가야사 스님들이 영탑사로 가야사의 탑을 옮겨와 쌓은 것으로 추정하나 모두 불분명하다고 한다. 영탑사를 나서서 당진 신암사의 금동여래좌상을 찾아 가는길에 당진 면천 읍성을 들러본다. [면천읍성 남문] 세종 21년 11월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평지 읍성이라 한다. 조선 후기까지 면천의 군사 및 행정 중심지의 기능을 한 곳이다. 성벽은 자연석으로 외부는 돌로 내부는 돌을 채운 후에 흙으로 덮었다. 성벽의 둘레 길이는 1.366m 이며, 면천의 남문은 옹성형태로, 18세기 이후 성의 기능을 상실한 후는 누각이 허물어지고 옹성을 따라 집이 지어졌으나, 2009년 이후 시작된 복원 정비 작업으로 원기루등 누각을 비롯한 남문의 시설을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하였으며, 2014년 완료 되었다 한다. 이 성이 왜구를 막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에 잠시 의아해 하며 자리를 떠나 신암사로 향한다. [ 신암사] 어렵게 찾은 신암사는 좁은 농로 길을 따라 들어가는 외진 곳에 자리한 찾기 힘든 작은 사찰이다. 신암사는 고려 충숙왕때 능성 구씨의 4대손인 구예가 가교리에 터를 잡으며 지어진, 구예의 부인 아주 신씨가 남편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하여 세운 절로, 원래는 구룡사라 하였었는데 후에 신씨를 기리는 뜻으로 신암사라고 절 이름을 고쳤다고 전해진다고 한다. [보물 제 987 호 당진 신암사금동여래좌상] 1989년 보물로 지정된 여래좌상은 전체적인 모습이 청양 장곡사 불상과 유사하다고 하는데, 당당한 모습이 무게감을 주며, 미소를 담고 있어 친근감을 주고 있다. 상체는 장대하며 볼륨감 있지만 부드러운 가슴을 가지고 있고, 하체는 넓으며 무릎의 근육이 표현 되어 있는 안정된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의상의 표현도 왼쪽의 팔소매는 무릎까지 내려오고, 법의는 들고 있는 오른 손에 걸려 배까지 이어지며, 나비형 띠매듭이 있다. 표현이 다소 다를뿐 14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서산 문수사나 청양 장곡사의 불상과 같은 유파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보물 제 987 호 당진 신암사금동여래좌상] 오늘도 멋진 문화재들을 접하며 마음이 많이 풍요로워 지는 것을 느낀다. 오늘 신암사의 보물은 적은 사찰이었으나, 수려한 부처님의 모습에 적잖이 놀란다. 문화재는 무엇보다도 애착으로 보존하는 것이 중요함을 알게 되고, 오늘은 그 안에 많은 숨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치 시작은 가족을 위한 부처님이, 지키고 정성을 다하고 있다 보니 보물로도 지정되고, 사찰의 많은 것이 권력에 의해 옯겨 간 것도 알게 된다. 문화재 속에 담긴 많은 이야기에 흥미가 더 해진다. 앞으로도 보물을 찾아보며 그 안에 담긴 이야기들을 들어 보아야 겠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향한다.